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KU ABS [책 읽어주는 여자 1화] - "내 심장을 쏴라" 2016.09.26 23:02 ABS 조회 수 : 1555 추천 수 : 1 댓글 수 : 3 "책 보여주는 여자 1화" 이번 책 보여주는 여자가 보여줄 책은? 정유정 저자의 '내 심장을 쏴라' ! PD 정혜연 ENG 전세훈 NAR 한채은 첨부 1 제목 없음.jpg 27.4KB 추천 1 비추천 목록 신고 댓글3 오오오오오란다 17.03.10 12:21 신고 감사합니다 건국건국건국 17.08.21 17:04 신고 잘봤습니다 스톰쉐도우 17.08.22 12:10 신고 잘봤습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KU ABS [책 읽어주는 여자 1화] - "내 심장을 쏴라" "책 보여주는 여자 1화" 이번 책 보여주는 여자가 보여줄 책은? 정유정 저자의 '내 심장을 쏴라' ! PD 정혜연 ENG 전세훈 NAR 한채은 KU ABS [건대의 딜레마 ①] - 수강신청편 건대의 딜레마 - 수강신청편 듣고싶지만 항상 들을 수 없는 인기 강의들 수강신청을 실패한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다! 좋은 교수님+팀플발표 vs 이러닝+중간 과제 대체 당신의 선택은??? 댓글 남겨주세요~ PD최은지 ENG 임형재 ANN 조덕현 임수현 KU ABS [29초 드라마] - ep.1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 29초 드라마 ep.1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 PD 김혜나 ENG 한건희 ANN 윤지현 건대신문 [보도] 총학생회 ‘비상직권’ 개정안, 대의원들 “계엄령과 닮아있다”며 우려 총학생회 ‘비상직권’ 개정안, 대의원들 “계엄령과 닮아있다”며 우려 2016학년도 하반기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에서 총학생회 <한울>이 발의했던 학생회 관련 규정 개정안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총학생회장에게 단독 의결권을 부여하는 ‘비상직권’ 조항이 많은 대의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발의된 내용은 △본 회의 의사결정권 순서 △총학생회의 비상직권에 관한 조항이다. 현행 학생회칙 조항을 살펴보면, 제8조에 “학생총회는 본 회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모든 회원으로 구성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13조에도 “전학대회는 본 회 최고의사결정기구로 활동하며, 대의원 전원으로 구성한다.”라고 적혀져 있다. 학생총회와 전학대회 둘 다 ‘최고’의사결정기구라고 표현되어 있어, 둘 중 어느 쪽의 의사결정권이 우선하는가에 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개정안이 발의됐다. △제1조에 “① 본 회의 의사결정권은 학생총회,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운영위원회 순서로 한다.”라는 조항을 추가하고, △제13조에 쓰인 ‘최고’라는 단어를 삭제하자는 안건이다. 전학대회에 참가한 대의원이 회칙 개정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용우 기자) 그러나 문제는 두 번째 발의안인 “② 총학생회장은 본 회 및 학내외 위기사항과 이에 준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비상직권이 허용된다.”라는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 가리키고 있는 ‘위기상황과 이에 준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관해서는 조항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칫 권한이 오남용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 비판의 주요 골자다. 아예 폐기하든지 혹은 아주 정교히 가다듬어야 할 개정안이라는 것이 대의원들의 주된 의견이다. 이날 이어진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에서 변영성(공과대‧토목공4) 부총학생회장은 이러한 개정안을 발의한 이유를 “예를 들어 총장이 빠른 결정을 요구할 때 필요한 조항이라 명시하려 했다”라고 설명했다. 문제가 된 신설 개정안에 대해 윤재은(정치대‧정치외교4)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계엄령과 상당히 닮아있는 규정이다”라고 말했다. 김상근(문과대‧영어영문4) 문과대 학생회장은 “아무리 예외적인 경우더라도 최소한 중운위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위 발의안은 모두 이번 전학대회에서 발의 자체가 무효로 처리됐다. 발의안이 사전에 공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학생회칙 99조에 따라 회칙 개정안을 발의할 때는 전학대회 7일 전부터는 일반학우들에게 공고해야 한다. 중운위는 발의안내용을 다시 논의해 임시전학대회를 열어 다시금 발의할 것으로 보인다. 임시전학대회를 열 것인가에 대한 의결은 12일 있을 중운위에서 정해질 예정이다. 김현명 기자 wisemew@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사회] “도(道)를 아십니까?” 그래서 직접 한 번 알아 봤다. “도(道)를 아십니까?” 그래서 직접 한 번 알아 봤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8월 중순, 방중에도 토익공부를 위해 학교를 찾았다. “중고서점이 어디에요?” 인상 선한 남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하며 갈 길을 재촉했지만, 그들은 “인상이 너무 좋아서요”라며 옷깃을 잡았다. ‘아...또 이 사람들이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아, 감사합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난 후에야 그들의 손짓을 뿌리칠 수 있다. 그들을 만나는 날이면, 기분 좋았던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이런 일화는 우리대학 캠퍼스나 건대입구역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며 지나가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을 따라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정성을 드리러 가자”고 회유를 하는 사람들은 ‘대순진리회’의 한 종파 소속 신자들이다. 이들은 보통 2인조로 돌아다니며, 포교활동을 한다. 더 이상 “도를 아시나요?”란 구닥다리 수법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는다. 길을 묻거나, 사주를 봐주겠다거나, 얘기를 나누고 싶다 등의 비교적 자연스러운 말들로 접근한다. 우리대학 학우라면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을 따라가면 무슨 일을 겪을까? 심심치 않게 피해사례도 들려오는 일명 *‘도믿맨’들의 실태를 알아보자. <건대신문>은 기자의 신분을 숨기고 ‘도믿맨’들을 따라가 봤다. 옷깃을 잡는 사람들 “근처에 시장이 있나요?” 요즘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수법이다. 길을 묻는 척하며 사람들에게 접근한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길을 안내하다보면 어느덧 “인상이 좋아보여요”말을 듣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두 번째 레퍼토리. 인상이 좋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 그들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게 되면 “조상님들께 효도를 해야한다”며 이내 속내를 비추기 시작한다. 자신을 ‘당신같이 복이 많은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다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고 “조상님의 복을 받으려면 정성을 드려야한다”는 설명을 진지한 얼굴로 이어나간다. 인상이 좋아 보인다는 말로만 사람들을 꾀지 않는다. “학생 주변에 대화 상대가 없어서 답답해 보인다”, “외로운 기운이 있어 보인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아픈 구석을 이용하기도 한다. 반응을 보인다면 신도들끼리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 강조한다. “우리와 함께라면 절대 외롭지 않을 것”이란 달콤한 말과 함께 같이 가자고 설득한다. 이 방법도 저 방법도 먹히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을 ‘집안의 열쇠와 같은 인물’이라 설명할 것이다.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수법으로 끈질기게 포교활동을 하는 그들의 말을 단호하게 무시하고 떠나지 않는 이상, 설득은 계속된다. 이들이 말하는 ‘효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대순진리회 신자 A씨의 말에 따르면,정성을 드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제사상을 차리듯 간단한 음식을 준비한 뒤, 일련의 종교 의식을 시작한다. 의식은 경우에 따라 3명~4명이 함께한다. 상 앞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조상을 부르고, 예를 갖추는 행위를 한다. 몇 번의 절을 올리고 향을 피운다. 그 뒤, 의식의 진행자는 주술같은 말을 하며 조상의 은덕을 빈다. 이 행위는 모두 조상님과 가족, 그리고 본인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의식은 자신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취재 중 만난 대순진리회 사람 중에는 평범한 모습의 대학생도 있었다. 서울권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남성은 “2년 전 길에서 두 명의 여성을 만났다”며 자신의 경험을 설명했다. 그는 “처음엔 무서웠지만 그 사람들과 말이 너무 잘 통해서 따라가 정성을 드리게 됐다”며 “좋은 인연을 만나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말했다. “방중이지만 이렇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라고도 덧붙이며, 계속 자신들이 이상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곳에선 무슨 일이? 혹여 그들의 사탕발림 말에 따라갔다면, 대순진리회의 지부격인 ‘공부방’에 도착할 것이다. 기자가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공부방은 성수동에 위치했다. A씨는 공부방에대해 “개방된 공간으로 사람들의 차도 마시고 마음공부도 하는 곳”이라며 “대학생들도 많고 멀리에서도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하루에 20명 정도가 정성을 드리러 온다”며 이상한 곳이 아니라고 누차 강조했다. 성수동 공부방은 예상과 달리 깔끔한 외관의 3층 빌딩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에 다다른 뒤 “이상한 곳이 아니냐”라고 슬쩍 찔러보자, 그들은 건물 1층에 세워져 있던 유모차와 아동용 자전거를 가리키며 “이렇게 어린 친구들도 와 있으니까 이상한 곳이 아니다”라며 안심시켰다. 그들은 건물 2층과 3층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자를 3층으로 안내했다. 2층의 모습은 계단을 오르며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문이 하나 있고, 그 앞에 놓인 신발장에 신발이 가득 차 있었다. 3층에 들어서자 강당 같은 큰 공간이 나타났다. 은밀하고 음침한 공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상당히 넓고 쾌적하며 조명도 밝았다. 앉은뱅이책상이 몇 개가 놓여있었고, 중년의 여성들과 비교적 젊어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녀는 강당 옆에 딸린 조그만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방 안에는 조그만 책상이 있었고, 그 옆에는 한자가 적혀있는 종이가 놓여있었는데 “바로 이 종이에 이름을 써서 태우는 것이다”라고 여성이 말했다. 책상 건너편에는 한복과 비슷하게 생긴 예복이 놓여 있었다. 남성은 마실 것을 가지러 가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고, 여성은 기자와 같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더 이어가려 했다. 순간 ‘저 방문이 닫히면 여기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 기자는 남성이 없는 틈을 타 전화를 받는 척하며 서둘러 건물을 빠져 나왔다. 기자는 사전에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것임을 인지하고 있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엔 대순진리회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경험담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정성을 다 드린 후 ‘음식 값’을 내라”며 금품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증언과 “개인정보를 알아내 끊임없이 연락이 오기도 했다”는 식의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도믿맨’을 만난다면 “이렇게 행동하라”는 식의 ‘행동강령’까지 등장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도 그들의 대답은 한 곳으로 연결된다. “그러니까 조상님들께 정성을 드려야 해요”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승진(교양대·심리 전공)교수는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여러 증거들이 주어지더라도 그 증거들을 인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정보만 수용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은 지능이 얼마나 높고 낮냐를 떠나 성격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라며 “보통 의존성과 이타성이 강한 사람이 종교 집단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바넘 효과’도 언급했다. 바넘 효과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성격 특성을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믿으려는 현상’으로 “그들의 말이 논리적으로 크게 오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길거리 포교인들을 따라가기 쉽다”라고 설명했다.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 없어 이러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고려할 때 포교인들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삼포세대’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힘든일을 다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은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달콤한 말이다. 이처럼 청년들의 힘든 상황을 이용해 금품까지 갈취하는 사람들이 우리대학 주변에 존재한다. 그들의 잘못된 믿음에 바로 옆의 학우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실제로 광진구청과 광진경찰서에 문의한 결과, “이러한 포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민 신고가 가끔 들어온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의 제재에 관해선 광진경찰서 민원봉사실 B직원은“포교활동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며 “포교활동 자체가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따로 단속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포교과정 중에 강압적인 신체접촉이나 협박행위를 하면 제재는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처벌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고 도믿맨들은 그들의 논리를 맹신하고 있어 우리학교의 도믿맨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학우들의 대처가 중요하다. 도믿맨들이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자신을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않을 강단이 필요하다. 그들을 따라가면 금품갈취 등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이 접근한다면 내칠 수 있어야 한다. 몇몇 너무 착한 사람들은 그들이 다가올 때 미안한 마음에 내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믿맨들은 자신들이 피해를 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따라서 도믿맨들을 잘 대해 주면 자신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들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도믿맨 : 대순진리회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도를 믿습니까’를 언급 하는 사람(man)의 준말이다.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 공동 공간 대여 제한되는 연합동아리 공동 공간 대여 제한되는 연합동아리 학술 및 체육시설 공간 대여 공지 켑쳐본. 신청 대상을 '본교 재학생으로만 구성된 단체'로 규정하고 있어, 연합동아리는 대여가 일부 제한된다. 현재 학생복지처는 연합동아리의 학술및 체육시설 대여를 일정 부분 제한하고 있다. 이 방침에 대해 동아리 연합회(동연)는 지난 5일 열린 전학대회를 통해 “공간 대여를 제재한 대상 중 연합동아리는 제외해 달라”는 내용의 요구안을 대학본부에 전달했다. 학술 및 체육시설 공간 대여의 신청은 ‘우리 대학 재학생으로만 구성된 단체’로 제한하고 있어 △졸업생 △외부인 △연합동아리는 사용이 불가하다. 본교 학생들만 공동공간을 사용해도 이미 포화상태라는 게 학생지원팀의 설명이다. 실제로 제1학생회관 2층 중강당의 경우, 이미 9월 중순까지 주말을 포함한 대부분 시간에 예약이 잡혀있다. 학생지원팀 탁일호 주임은 “본교 학생들만 사용하기에도 공간이 부족해다른 대학생이 오는 행사에까지 공간을 대여해줄 수는 없다”고 전했다. 때문에 타대학 학생과 연계한 연합동아리의 행사엔 대여가 제한된다는 설명이다. 윤재은(정치대ㆍ정외4) 동연회장은 “우리대학엔 중앙동아리로 인준 받은 연합동아리가 10개 이상 활동하고 있다”며 “이 동아리들은 특성상 타 대학과 연계된 활동을 많이 진행하는데, 학생복지처의 방침 때문에 우리대학 재학생이 행사를 주도하더라도 학내에서 개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위와 같은 요구안을 제시한 이유를 설명했다. 노동자연대 학생 그룹 소속 김무석(수의대ㆍ수의학4) 학우는 “우리 동아리만 해도 학기당 2~4회의 연합행사를 진행한다”며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다른 대학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다면 더욱 풍요로운 활동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학생지원팀의 비일관적인 조치도 지적됐다. 익명을 요구한 A 연합동아리 회장은 “저번 학기에 우리 동아리가 주최하는 연합행사를 본교 체육시설에서 진행한 적이 있었다”며 “연합동아리라도 본교 재학생만 사용하겠다고 신청하면 받아준다”고 전했다. “공간대여 제한 방침 때문에 이렇게 신청해놓고 타대학생을 몰래 데려오는 경우도 많다”고 고백했다. 동연의 요구안은 학생복지처에 전달됐지만, 방침수정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탁 주임은 “동연에서 의결한 내용이지만, 동연소속 학생은 전체 학생의 10% 미만”이라며 “소수의 학생들을 위해 모두가 사용하는 공간의 대여 방침을 수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전했다. 정두용 기자 jdy223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인터뷰] #3 김미희 전 국회의원, “건대 항쟁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3 김미희 전 국회의원, “건대 항쟁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김미희(서울대ㆍ84학번) 전 국회의원은 1986년 당시 약학대 학생회장 신분으로 건대 항쟁 참여했다. 건대 항쟁을 전환점으로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정치계에 입문했다는 그녀는 19대 국회의원까지 당선됐지만,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며 의원직이 박탈됐다. 그렇게 그녀의 ‘진보 정치’의 길은 끝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만난 김 전 의원의 모습은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며 웃음 짓는 그녀에게 ‘건대 항쟁’은 어떤 자양분이 되었을까? 김미희 전 국회의원 (사진ㆍ정두용 기자) Q. 건대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시게 됐나요? 저는 당시 서울대 약학대학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과제는 부당한 군부정권을 마감하고,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현실적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는 대학생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과제였고, 우리의 미래와도 직접 연관돼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학투련의 결성식이 건국대학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은 크게 *<자민투>와 <민민투>로 나뉘었는데, 이렇게 양분된 학생운동을 반성하고, 애학투련으로 모아내며 실천방향을 정하는 결성식이었습니다. 또한 반외세, 반독재, 평화통일의 구호는 시대의 과제이며 꼭 필요한 목소리였죠. 저는 이런 애학투련의 의의와 구호에 동의했고, 뜻있는 약학대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Q. 건대 항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결성식이 끝나고, 집에 가려던 찰나에 전경들에게 포위됐습니다. 우리는 잡히지 않으려고 본관(현, 행정관)으로 들어갔죠. 우리는 전경들에게 “우리는 평화시위를 진행했다.”고 말하며 ‘안전귀가’의 보장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농성은 3박 4일 동안 진행됐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농성에 본관의 학생들은 굶주림에 지쳐갔습니다. 전경의 포위를 뚫고 음식을 구해오는건 당연히 불가능했죠. 매점은 사회과학관(현, 경영대)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과정으로 가능했는지 세세히 기억할 수 없지만, 희망의 끈이 연결됐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밧줄을 연결한 것이죠. 학생들은 밧줄이 연결되자,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밧줄을 타고 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전달된 돈은 사회과학관 매점에 놓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음식이지만 많은 학생들이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20명 남짓의 학생들과 함께 어느 교수연구실에 있었는데, 그때 우리 방으로 온 음식은 초코파이 다섯 개와 수프 두 그릇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서로 양보했고, 누가 더 먹겠다고 싸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양의 음식이지만, 기분 좋게 옆 학생과 나눴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Q. 건대 항쟁에 참여한 경험이 이후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농성이 특수부대의 진압으로 끝나며, 많은 학우들과 함께 구속되면서 저 역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학생회장으로서, 선배로서 후배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지 못한 죄책감과 무력감을 경험했죠.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건대 항쟁을 통해 제 삶의 지향점을찾을 수 있었습니다. 애학투련 결성식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건대 항쟁 이후, 저는 집행유예를 받기 전까지 100일 가량을 서울구치소에서 지냈습니다. 학교는 집행유예를 받은 학생들에게 ‘무기정학’을 일괄 통보했죠. 87년 2월 석방되어 7월 복학 통보를 받기 전까지 많이 힘든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해답을 80년 광주항쟁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기정학 기간 고향인 목포에 있었는데, 처음엔 막막하더군요. 그러던 중 5월, 친구에게서 자기네 학보에 실을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주제는 광주항쟁이었죠. 그 글을 위해 광주항쟁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며 많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희망을 찾았죠. 80년 광주는 무정부상태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양심이 살아있던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초코파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저희처럼 말이죠. 광주항쟁이 실패가 아니듯이, 건대 항쟁의 의미도 뚜렷합니다. 또한, 광주항쟁을 공부하며 많은 시민들이 저와 같은 생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음이 증명됐죠. 건대 항쟁은 제 삶의 방향을 굳히는 큰 계기였고 전환점이었습니다. Q. 사회는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신가요? 네! 물론입니다. 제가 정치의 길을 걸으며, 암담한 현실에 직면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대 항쟁의 좌절이 6월 민주항쟁을 촉구했던 것처럼,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던, 소수정당으로 지역구 의원 당선돼서 올바른 이야기를 국회에 전달할 수 있던 기회를 성남시민들께서 주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또, 최근엔 20대 국회를 ‘여소야대’로 국민들이 만드셨을 때도 전 희망을 봤습니다. 86년 10월의 건국대 서울캠퍼스는 그런 희망이 넘치는 공간이었습니다. 건대신문을 읽고 계시는 건국대 학생여러분은 뜻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공부한다는 자부심을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자신의 개성과 적성에 따라 직업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 우리나라에서 같은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해결할 과제가 무엇이고, 그 과제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도 고민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 같네요. *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화 투쟁위원회(민민투)와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는 85년의 전학련 산하 삼민투위에서 학생운동권의 투쟁세력간의 노선 차이로 양분된 것으로서, 이후 여러 차례 개편과 이합집산을 거쳤다. * 이 기사는 3번째 연재기사로, 10.28 건대항쟁 30주년을 기념하고자 기획됐습니다. 정두용 기자 jdy223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인터뷰] #2 건대항쟁, 66시간 50분의 외침 #2 건대항쟁, 66시간 50분의 외침 “어쩌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겠어요” 10.28 건대항쟁에 참여한 오도엽(경제ㆍ86)시인은 시<기억하지 않아도 기념하지 않아도-스물의 청년이 된 시월이십팔일 생 건대항쟁에게>에서 최동근(경제ㆍ84)동문을 기억하며 “검게 불타 화상을 입은”이라 적었다. 경찰의 강경 시위 진압에 맞서 사회과학관(현, 경영대)에서 끝까지 투쟁하며 66시간 50분을 버틴 최 동문은 인터뷰 중 당시를 기억하며 “불의에 맞서 싸웠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66시간 50분 동안 우리가 걷고 있는 캠퍼스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더위에 드러난 최 동문의 팔과 다리엔 아직도 선명한 10.28 건대항쟁의 외침이 새겨있다. 전경의 진압봉에 맞아 기억을 잃을 정도로 격렬히 불의에 맞서야 했던 86년 가을, 그 뜨거운 현장의 기억을 <건대신문>이 최 동문과 주승혜(영문ㆍ85)동문에게 물었다. 주승혜(영문ㆍ85)동문(좌)과 최동근(경제ㆍ84)동문(우) Q. 1986년 10.28일부터 66시간 50분 동안 건국대학교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최 동문(이하 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대항쟁은 ‘준비된 농성’이 아니었단 사실입니다. 애학투련의 당초 목적은 결성식을 통해 사회에 학생들의 통일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농성은 전경의 강경진압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물론, 결성식을 전경으로부터 사수하기 위한 준비는 있었습니다. 애학투련이 연세대에서 열린다고 거짓정보를 흘리거나, 혹여 있을 전경과의 충돌에 방어선을 미리 구축하거나, 건대 본관(현, 행정관) 앞에서 결성식이 무산됐을 경우 학생회관과 공대 사이에서 결성식을 진행하는 방안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성을 위한 준비는 전혀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나름의 준비 끝에 결성식은 시작됐습니다. 오전에 학교별 참가인원을 조사했는데, 제 기억으론 3000여 명 가량 모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경들이 들어 닥치기 시작한 건 결성식이 끝나갈 무렵이었죠. 특히 건국대 부속 고등학교방향에서 물밀 듯이 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본관에 있던 학생들은 포위됐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근처 건물이었습니다. 본관은 물론, 사회과학관, 이과대(현, 법과대), 학생회관, 도서관 등 전경의 포위망 안에서 건물로 숨었습니다. 우리대학 학생인 경우, 학생증을 보여주고 포위망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타대학생인 경우는 그게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전경에게 잡히면 바로 구타와 연행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사회과학관으로 몸을 피했는데, 처음만 하더라도 하루정도 뒤에 전경이 빠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전경의 포위로 인해 농성이 진행된다면 하루 뒤에 상황이 해제 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예상한 것이죠. 하지만 9시 뉴스에 애학투련의 대자보나 홍보물을 왜곡 보도하며 저희를 ‘좌경용공 세력’으로 모는 것을 보곤, 심상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저희는 농성으로 이어질 줄 몰랐기에 먹을 음식도 몸을 데울 땔감도 없어 농성이 길어진다면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경의 포위망은 3박 4일간 유지됐습니다. 방송을 통해 저희를 좌경용공 세력으로 몰은 이튿날부턴 투항하라는 방송과 함께 헬기로는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이 전단지를 들고 나오면, 선처해주겠다는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구속이 됐던 수많은 학생들은 더욱 뭉쳤습니다. 심지어 본관에선 결성식에 사용한 앰프를 통해 “투항하라”는 방송에 맞서는 방송을 하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란 팜플렛을 걸기도 하며 맞섰습니다. 이렇게 저희는 포기하지 않고, 불의에 맞섰습니다. 사회과학관에선 주인아주머니가 없는 매점에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가져갑니다”란 쪽지 함께 돈을 모아 올려놓고, 음식을 가져다 먹기도 하면서 말이죠. 도서관에선 공부를 하러 온 학우의 도시락을 같이 나눠먹기도 했습니다. 또,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학생들은 서적이나 주요 기물들엔 손대지 않았습니다. 전경이 학교 벤치를 부셔서 땔감으로 사용한 모습과는 대조적이죠. Q. 농성은 어떻게 마무리 됐나요? 최: 이렇게 소모전이 계속되자 4일째 되는 날 전경과 *백골단의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과학관은 마지막에 진압됐는데, 대부분 백골단이 투입돼 진압의 정도가 심했습니다. 사회과학관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옥상이 아닌 5층 계단에서 전경과 맞서자는 계획을 세웠죠. 하지만 진압 중 화재가 발생했고 모두 옥상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마지막까지 계단에서 물품을 옮기고 있었는데, 순간 불길이 솟으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화상을 입게 됐죠. 그렇게 정신을 잃었지만, 딱 하나 기억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워 있는 저를 학우들이 옮기는 중, 백골단이 휘두른 진압봉에 맞아 계단에 구르며 잠시 정신이 들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살아있는 게 다행이죠. 그렇게 농성은 전경의 폭력에 마무리 됐습니다. 최 동문은 당시 백골단의 진압과정에서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사진ㆍ정두용 기자 주 동문(이하 주): 저는 전경의 포위 당시 학생회관으로 숨었는데, 학생회관은 결성식이 있던 본관과 거리가 멀어 비교적 적은 3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4일째 진압과정에선 남학우들의 보호를 받아 다른 학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맞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휘두르면 남학우들이 몸으로 막아주었죠. 하지만, 당시 전경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모습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죠. 너무 무서웠고, 두려워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멍하니 서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건대항쟁 진압의 마지막입니다. Q. 현 대학생들은 건대항쟁을 어떻게 기억해야할까요? 주: 우선 제가 기억하는 건대항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정부는 애학투련을 일순간 ‘빨갱이 집회’로 만들어 버렸고, 우리의 명예가 실추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명예는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건대항쟁의 4일의 기억은 어쩌면 제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그렇게 하나 되어 마음을 모을 수 있을까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고, 그로인해 제 인생은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애학투련의 외침은 30년 전 끝났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건대항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남겨두지 말고, 현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울로 바라봐줬으면 합니다. *백골단 : 1980∼1990년대 학내 시위자들과 시위 군중들을 진압하고 체포하기 위해 구성된 경찰부대를 일컫는 별칭으로, 대부분 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이 특채되어 구성됐다. ※이 기사는 건대항쟁 30주년 특집 연재기사입니다. 정두용 기자 jdy223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인터뷰] #1 현 시대에 필요한 민주화의 목소리, 건대항쟁이 중요한 이유 #1 현 시대에 필요한 민주화의 목소리, 건대항쟁이 중요한 이유 올해는 ‘10.28 건대항쟁’이 일어난지 30년 째 되는 해이다. <건대신문>은 10.28 건대항쟁의 의의를 재조명하고 그 이념을 계승하고자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참가자들의 인터뷰를 연재 할 예정이다. 이번호에서는 그 시작으로 이상근 기념사업회 공동준비 위원장과 이중기 청년건대 동문회장을 만났다.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당시 10.28 건대항쟁 구속자 변호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건대항쟁 30주년 학술 심포지엄에 보낸 축사내용이다. 박 시장의 말처럼 현대 민주주의는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형식적인 틀은 갖추어졌으나,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의 완성은 아직 ‘진행 중’ 이다. 우리대학 민주동문회 ‘청년건대’와 ‘애학투련 건대항쟁 30주년 준비위원회’는 학생운동의 의의를 재조명하고, 아직까지 유효한 ‘애학투련’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들은 ‘애학투련 건대항쟁 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를 발족하며 현 시대에 필요한 민주화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건대항쟁의 정신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건대신문>이 들어봤다. 이중기(물리ㆍ87학 번) 청년건대 동문회장과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이상근(연세대ㆍ85학번) 공동준비 위원장에게 건대항쟁을 재조명하는 일의 의의와 향후 활동계획을 물었다. Q.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10.28 건대항쟁은 군부독재에 항거한 학생운동입니다.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형식적 민주화’도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때문에 민주화 요구운동은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의 틀이 갖춰졌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형식적 구조만으로 보장된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총선으로 박근혜정부의 레임덕*이 확실시됐지만, 그 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들은 ‘탄압국면’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저희가 학생일 때, 군부독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간 정부는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방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수많은 사건에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을 ‘좌경용공’이라 몰아세웠던 것처럼, 지금 정부도 ‘종북 프레임’으로 이름만 바꿔 여전히 많은 얘기들의 입을 막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희는 잘못된 정부에게 문제제기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때문에 현 상황에서 과거 건대항쟁의 의미는 더욱 소중합니다. 민주주의가 형식적이 나마 이뤄진 결정적인 계기엔 학생운동이 있었습니다. 건대항쟁은 당시 학생운동들의 상징이자 중심이 됐고, 이때 주장했던 학생들의 사회에 대한 요구는 지금 상황에서 더욱 필요한 목소리입니다. 저희는 건대항쟁의 이념들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80년대에 군부독재에 항거한 학생들의 주장들이, 폭발적인 여론을 형성하며 내세운 학생들의 요구들이, 현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현 사회에 필요한 문제제기의 구심점을 위해 발족했습니다. 이 사업회를 중심으로 여러 활동을 이어나가고, 개별적인 차원의 문제제기가 아닌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Q.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건대항쟁 30년을 기념하며 발족한 기념사업회의 활동 목적은 명확합니다. 16개 대학 민주동문회와 4개의 추모사업회 소속 150여명이 기념사업회란 이름으로 ‘우리사회의 민주화 실현’을 위해 모였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기념사업회를 통해 건국대학교 동문뿐만 아니라 건대항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을 형성하고, 건대항쟁의 이념을 계승할 수 있는 사업들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 네트워크 구축 △세월호 연대 활동 △정기적 심포지엄 △당시 구속인들의 재심청구 △건대항쟁 형상화 사업 △건대항쟁 관련 도서출판 △대학의 정상화를 위한 활동 등 다양한 사업들을 계획했습니다. 모든 활동이 중요하고,의미가 있겠지만 <민주주의 네트워크 구축>과 <대학 정상화>의 사업들은 더욱 중요합니다. 민주주의 네트워크를 구축 한다는 것은 이미 사회에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 단체들과 연합해 조금 더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요구를 사회에 전달하자는 의미입니다. 내년에 예정돼있는 6월 민주항쟁 기념행사에 함께 참여하고, 세월호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체와 연대하는 등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소통의 창구를 다방면으로 마련하고자 합니다. 또한 현재 취업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대학을 정상화하기 위한 사업들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학원처럼 변해버린 대학을 다시 지식의 상아탑으로 정상화시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대학 내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Q. 재심청구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세요 당시 정부는 건대항쟁에 참여한 1,289명을 구속하였으며, 이 가운데 398명을 기소했습니다. 이중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살이를 한 인원은 100여명이 됩니다. 민주화의 요구가 ‘유죄’라며 좌경용공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무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민주화가 실현 됐다’고 말하는 현 사회에서 말이죠. 물론, 노태우의 6.29선언 후 건대항쟁으로 징역살이를 하고 있던 대부분이 사면됐습니다. 하지만 사면의 의미는 유죄이나, 석방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몇몇 인원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조금의 명예가 회복됐고, 구속일수 등에 관한 소액의 재정적 보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개별적 차원의 보상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정부가 건대항쟁에 대한 성격을 조작해 ‘좌경용공’ 누명을 씌운 것을 인정하며 무죄로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개별적 차원의 보상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건대항쟁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일이죠. 실제로, 건대항쟁이후 집단적 폭력에 의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생겨 자살까지 한 인원이 있습니다. 건대항쟁의 성격을 정부가 조작했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은 이런 인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일이며,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일입니다.이번 학술심포지엄은 학술적으로 건대항쟁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부분이 최선을 다해도, 전체적인 변화는 힘들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회 구조에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경제적ㆍ사회적 선이 있습니다. 이는 현 대학생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사회구조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무리 노력해 스펙을 쌓아도 취직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죠. 이는‘경제민주화’, ‘노동민주화’ 등의 요구로 사회전반의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해결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대 학생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당 사자들이 직접 나서 사회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목소리로 사회구조가 변화하려면 부분의 노력으론 어렵습니다. 전체가 나서 변화를 요구해야합니다. 청년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대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목소리를 내줬으면 합니다. *레임덕 : 대통령의 지도력이 저하되는 현상으로, 임기 말이나 중간선거에서 여당이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주로 나타난다. 정두용 기자 jdy223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KU ABS [뭐든지 만들어 보겠습니다 ③]- 나무의자 편 뭐든지 살 수 있는 시대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보는 DIY 프로젝트! 이번에는 어디서든 편리하게 앉을 수 있는 나무의자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목록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Next / 83 GO / 83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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