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칼럼]“You don't listen, do you?” 문화부 공예은 기자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야지”라는 말을 하며 서로를 차별 없이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말은 아이들이 지키기에는 생각보다 어렵다. 어른들도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데에는 매우 서툴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조커’는 어른들의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영화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사회 속에 방치돼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심리 상담을 하며 과거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가 더 좋았다는 말을 한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그에게는 더 감옥 같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무시하고 조롱한다. 그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주인공 ‘아서 플렉’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진 채 잔인하게 살인을 하는 ‘조커’가 돼버린다. 이때 영화를 보며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이 영화 속 악당은 ‘조커’ 뿐일까? 영화에서는 이러한 ‘조커’를 만드는 건 바로 우리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서 플렉’처럼 가정 폭력, 신체적 장애, 심리적 장애, 빈곤 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영화에 나오는 ‘조커’는 우리 사회에도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사회 속에서 우리는 ‘조커’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우리 또한 ‘조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은 차별을 낳는다. 누군가를 소외시키다보면 결국 그 화살은 우리 스스로를 향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결점이 있고 이를 다수와 소수의 경계로 나눌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다수와 소수로 구분하고 나아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로 나눠 결국 차별로 이어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다수와 정상의 범주 속에 머물기 위해 타인을 소수와 비정상으로 내몰다보면 모든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 ‘아서 플렉’처럼 차별과 소외라는 심판대 위에 서게 된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감옥 안에 가두게 되는 것이다. 감옥 없는 사회를 만드는 방법은 바로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듣던 말이고 어른이 돼서는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쉽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되새겨도 지켜지지 않는 어려운 말이다.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은 심리 상담가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You don't listen, do you?" 이 대사를 통해 상담해주는 사람조차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의 현실을 알 수 있다. ‘다 함께’는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아서 플렉’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예은 기자 yeeunkong@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지금 마주하고 있는 직원은 고객님의 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박다은 대학1부장 “지금 마주하고 있는 직원은 고객님의 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고객들의 갑질에 고통받는 직원들을 위해 일부 사업장은 이런 멘트를 써붙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다. 특히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갓 성인이 된 알바생들은 크고 작은 갑질에 아주 자주, 회의감을 느끼곤 한다. 이 탓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서는 일명 ‘진상’이라 불리는 고객들을 응대한 경험에 대한 한풀이가 빠지지 않는다. 경험담을 풀어놓다 보면 도무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진상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지기 일쑤다.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는 고객부터, 획기적으로 신선한 갑질을 선사하는 고객까지. 고작 8,350원에 자존심이 팔려나간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혹자들은 아르바이트 중 갑질에 시달려 속앓이를 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사회생활 제대로 해보면 그건 별거 아니다”, “다 좋은 경험이 될 거다”라는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 일리있어 보인다. 우리가 살아나갈 세상은 더 각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일리 있는 세상에 산다는 걸 직시하는 순간, 더 비참해진다. 현실의 냉정함을 너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뎠는데, 너무 힘든데, 나아갈 사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닐 만큼 더 냉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사회를 바꿀 순 없을 것 같다. 바뀌지도 않을 것 같다. 근데 사실 이제 막 시작하며 상처받는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건 현실적인 조언도,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 거창한 혁명이나 변화도 아니다. 쌀쌀맞은 고객 뒤, 힘내라든가, 고맙다든가 하는 말을 건네는 다른 고객의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륵 풀리고 위로받은 느낌까지 드는 경험을 꽤 많은 알바생들이 해봤을 것이다. 가끔 각박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하다고 느끼게까지 된다. 그러다 보니 알바생이 아닌 고객의 입장으로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도 말 한마디를 따뜻하게 내뱉으려고 노력하게 되곤 한다. 지친 나에게 희망을 준 누군가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딱 한 마디의 따뜻한 말이 모여, 이제 사회로 발돋움할 이들이 상처부터 받은 채로, 세상을 신뢰하지 않은 채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론 기업이나 고용주의 차원에서 알바생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 그게 바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일인 것 같다. 뭐 거창한 말이 따뜻한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 ‘고맙다’는 말로도 충분하다. 물론 싫다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그저 ‘따뜻한’ 한마디가 싫다면 적어도 ‘차가운’ 한마디를 던지진 말자. 너무 이상적인 말일 수 있지만 모두가 노력해주면 좋겠다. 자신이 지불하는 그 대단한 돈으로 절대 사람의 인격을 해칠 권리까지 살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모두가 아는 그날까지. 박다은 대학1부장 daeunn011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징비록(懲毖錄)』이 다시 생각나는 까닭? 신병주 사학과 교수 최근 한일관계가 강경한 대치 국면을 보이면서, 역사 속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조선이 크게 침략을 당한 사건이다. 7년간의 전쟁 끝에 침략군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임진왜란이 끼친 파장은 컸다.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다시는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성의 분위기도 크게 대두되었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1598년 11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하회마을로 돌아와 『징비록』을 남긴 것이 대표적이다. 『징비록』에는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쳐 전개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및 전황에 대한 반성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징비록』의 제목 '징비'는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문장인 "여기징 이비후환(予其懲 而毖後患)"을 인용한 것으로, "나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 라는 반성의 뜻을 담고 있다. 유성룡은 서문의 첫머리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중에서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책을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영의정 등의 중책을 맡았으면서도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책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전쟁에 대한 경과뿐만 아니라 전란 발생의 원인과 조정의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점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전개 상황과 명군의 참전과 강화 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과 함께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 전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유성룡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놓고 백성들을 외면한 채, 또 골짜기 까지 들어간다면 다시는 한양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유성룡이 선조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이외에 『징비록』에는 이순신, 신립, 원균, 이원익, 곽재우 등 전란 당시에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인물평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임진왜란 당시 인물들의 활약상과 처신까지 확인할 수가 있다. 『징비록』은 그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개인의 저술로는 이례적으로, 국보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징비록』에서 제시했던 내부의 철저한 반성과 일본에 대한 냉철하고 정확한 인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에도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신병주 사학과 교수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각 계에 유일한 박사가 필요하다 최의종 편집국장 우리는 간편한 곽 화장지 ‘크리넥스’를 자주 사용한다. 크리넥스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71년 ‘유한킴벌리’로부터이다. 유한킴벌리는 1970년 우리나라 제약회사 ‘유한양행’과 미국의 제지회사 ‘킴벌리 클라크’가 4:6으로 합작 투자해서 만들어진 회사이다. 이 유한양행이 2017년 기준 3년 연속 매출 1조 원을 달성한 유일한 제약회사로 2016년에는 매출 1조 3209억 원을 기록해 국내 제약사 매출 신기록을 달성했다. 유한양행의 설립자는 이제는 우리들에게 생소하다고 느껴지는 ‘유일한 박사’다. 유일한 박사는 유년기 평양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아버지 유기연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 미국으로 간 유 박사는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유 박사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유학생활을 했다. 성인이 됐을 때는 항일집회에 참여,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후 1926년 귀국해 유 박사는 현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약들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1942년에는 미국에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을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런 그는 노년이 됐을 때 재산 중 자신의 손녀의 등록금을 제외한 407억 원을 기부했다. 무엇보다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서 언급되는 이유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유한양행의 후임 사장으로 지명했다는 점이다. 회사를 자신의 가족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9월 13일 명성교회 예배에서 김삼환 원로 목사는 “교회세습은 일반적으로 기업세습과는 전혀 다르다”며 “교회는 세습이 아니라 십자가를 물려주는 것, 고난을 물려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교회를 세습차원의 시각으로 보는 건 그들이 타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원로목사는 마귀란 단어를 사용하며 세습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는 14일 명성교회 세습과 관련 논평에서 “명성교회 세습은 탐욕 때문에 벌어졌다”며 김 원로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의 자진 사임을 촉구했다. 우리 사회에 다시 유일한 박사가 필요하다. 회사, 교회를 가문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절실하다. 우리 사회는 이제 내세를 바라보고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가 기업처럼 세습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귀라고 폄하하고 타락했다고 비판하는 사회가 돼버렸다. 이런 사회는 투명한 사회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엎으며 비판했던 점을 생각하면, 기독교에서의 신은 기업처럼 돼버린 교회를 보고 어떨지 궁금해진다. 최의종 편집국장 chldmlwhd73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갈등 관리하기 아마 모두가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봤을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너무나도 흔한 말이라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라고 느낄 법한 이 말의 뜻을 다시 한 번 짚자면, 인간은 사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말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수업시간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등하굣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 또 바로 옆에는 없어도 SNS를 통해 친구와 서로 연락하며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요즘 거의 모든 일을 할 때 우리 옆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가지각색의 취향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사람들 모두와 언제나 즐거운 관계를 형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갈등이일어날 수밖에 없다. 서로 선호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등이 일어났을 때 이를 잘 다스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질수도 있고 더 돈독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선가 ‘갈등관리를 즐겨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실제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다. 갈등은 어찌됐든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이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갈등 상황을 계속해서 접하면서 더 단단해질 수도 있고 한 번씩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많은 갈등 상황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보면 가장 많은 갈등을 겪은 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마다 힘들기도 했고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도 많이 됐다. 갈등을 관리하는 것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여전히 갈등 상황은 불편하고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다양한 갈등을 접하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던 것 같다. 2017년은 여러 의미로 뜻깊은 해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최수정 편집국장 popo6778@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강사법에 대하여 송기형 예술디자인대학 영상영화학과 명예교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있다. 낭만을 이야기할 나이가 지난 남자가 쑥스럽지만 낭만을 노래하면서, 낭만은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애틋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 어설픈 글 역시 그런 취지라고 말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겠으나, 정년퇴직한 다음에도 대학과 교육에 대해 발언하는 일이 꼭 주책맞은 짓만은 아니라고 본다. 강사법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대학교육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강사선생님들 처우를 개선하자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사법이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도 드물다. 왜 그럴까? 교육부가 강사선생님들 처우 개선을 위한 예산을 대학에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과 청년실업으로 요약되는 경제상황에서 정부의 등록금 인상 억제 정책은 여론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모든 대학은 예산 부족을 호소하고 있으며, 특히 재원의 대부분을 등록금에 의존하는 사립대학들은 대단히 어려운 처지라고 한다. 이런 판국에 교육부가 강사법을 강행하고 있으니 대학들이 난감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식으로 반발하는 대학이 없는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교육부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대학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부 폐지를 주장하는 몽상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학은 교육부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모든 언론이 앞다투어 대학이 강사법 시행에 미온적이고 꼼수를 쓴다고 질타한다. 어느 대학이 감히 대한민국 언론 보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강사법을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아니 강사선생님들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예산 확보가 필수적인데 막상 대학에는 여력이 없다는 핵심이 교육부와 언론의 힘 앞에서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한 최저임금제와 마찬가지로, 강사법이 강사선생님들 처우를 개선하기는 커녕 생존권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9년 2학기부터 시행에 들어가는 강사법이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하지 않으려면, 교육부가 강사법 관련 예산을 충분히 확보하여 대학에 분배하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정부의 전폭적인 예산 지원 없이 강사선생님들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대학도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사소하지만 말이다. 우리대학은 명예교수, 겸임교수, 대우교수 강사료를 시간강사료보다 조금 더 높이 책정하고 있는데, 이는 즉각 시정해야 한다. 시간강사료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책정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대학의 재정 여건에서 강사선생님들 처우 개선은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강사법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 아니 정상화되어 진정한 처우 개선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송기형 예술디자인대학 영상영화학과 명예교수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개헌을 막은 '발목 잡기' 야당 “권력구조 개편도 중요하지만 국민 기본권을 신장하기 위한 개헌이 중요하고…” / “국민들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년 지방선거때 함께 국민투표에 붙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봅니다.” 작년 4월, 제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대선 후보들의 개헌에 대해 쏟아내었던 말들이다. 당시 원내 5당의 후보들은 권력 구조 개편과 기본권 개정 등을 위하여 6.13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일제히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지선과 개헌 투표의 동시 실시는 사실상 물 건너 가버렸다. 지난 4월 25일, 국민투표법 개정에 실패하며 개헌의 골든 타임을 놓쳐버렸고, 5월 24일엔 대통령 개헌안이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인해 투표불성립으로 폐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 1년간 개헌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나아지길 바랐던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울상을 짓게 되었다. 과연 무엇이 우리 삶의 개선을 막은 것일까. 우선 개헌에 대한 국회의 의지가 부족했다. 개헌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국회에서는 지난 해 1월, 개헌특위를 만들어 1년 6개월의 활동 기간을 정하고 논의에 착수했다. 하지만 쟁점 사안을 놓고 각 당 간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를 놓고 국회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간 개헌에 대한 국회의 행보를 보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당 간의 알력 다툼, 그 중에서도 제 1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발목 잡기’ 행보다. 국정 농단 사건의 영향으로 떨어진 지지도, 그 중에서도 보수적 유권자들의 지지를 결집시키기 위해 정부와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국당은, 문 정부 출범 이후 자그마치 7회의 국회 보이콧을 선언하였다. 최근의 드루킹 특검을 놓고 펼친 단식 투쟁부터 권성동 법사위원장의 사퇴 요구에 대한 반발 보이콧, 방송문화진흥회 보궐이사 선임을 언론 탄압으로 규정하며 국정감사를 전면 보이콧 했던 일 등 사사건건 정부 여당과 각을 세우며 정국을 쥐기 위해 몽니를 부리는 형국이다. 그렇다 보니 국민의 3분의 2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 개헌안에 대해서도 매 사안마다 비토를 놓으며 6월 선거와의 동시 투표를 막았다. 물론 토지공개념과 권력 구조 개편 등 이견이 발생하는 사안에 대한 반대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방분권 강화, 선거연령 인하, 국민의 기본권 강화 등 대다수의 공감을 얻은 사안들까지 도매금으로 폐기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다. 1987년 이후 30여년 만에 개헌의 찬스가 왔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정치권의 불협화음으로 날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야는 소모적인 정쟁을 멈추고, 국민을 바라보며 개헌에 대한 논의를 조속히 이어가야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개헌안이 하루 빨리 국민 투표에 부쳐지기를 바래본다. 홍성준(사과대·경제17) ABS학원방송국 62기 부기장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기쁨, 슬픔과 같은 감정인 외로움 정지원 대학부 기자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가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신기한 것은,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외로움의 사전적 의미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이 정의처럼 우리는 대체로 혼자가 되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학기 중이라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같이 놀러도 가고 같이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렇지 않고 혼자 있을 때는,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혼자 방에서 아플 때 가장 서럽다는 것을 대부분의 자취생이나 기숙사생들을 이해할 것이다. 서럽다는 감정도 외로움의 한 부분이겠지.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든 외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사실 필자는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한 지 오래되어 이런 생활에 적응되었다고 생각하였음에도, 아직도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아마 외로움은 평생 적응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이런 외로움에 대해 우리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있을까. 종종 자신은 혼자인 외로움도, 사랑의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다며,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거창한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하곤 한다. 외로움도 감정의 일종일 뿐인데 왜 거창한 것이라 여기는가. 남들과 달리, 자신이 생각했을 때 외롭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외로움인 것이다. 여러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중,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외롭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연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연인과 있는 시간이 공허하고 외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기쁨, 슬픔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서 쉽게 직면할 수 있는 감정이다. 혼자가 되었을 때의 외로움을 예로 이야기해보자. 처음에는 쓸쓸함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혼자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찾아올 것이다. 아무래도 혼자 있어서의 외로움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부터 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를 위한 시간이니까 말이다. 사람마다 외로움을 느끼는 상황도, 외로움의 크기도 전부 제각각이기에,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행동을 하면서 행복해지거나 쓸쓸함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것은 자신만의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한 번쯤은 자신이 어떠할 때 외롭다고 느끼는지, 이 쓸쓸함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쩌면 외로움은 항상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닐지. 우리의 빈틈을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아닌 행복과 기쁨으로 채우는 것은 어떠한가. 정지원 기자 wldnjs150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과거, 현재, 미래 올 여름은 예년에 없이 장기간 계속된 폭염으로 냉방이 잘 들어오는 상허기념도서관에서 그동안 못 읽었던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요즈음 학생들은 책도 잘 안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많은 학생들을 보면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저 학생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꿈꾸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기에 우리는 현재를 사는 것 같지만 현재는 곧 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은 미래를 지향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하루, 한 달, 그리고 바쁘게 지내는 많은 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미래와 관련된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생활은 미래를 지향해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저마다 미래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위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비해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세상을 먼저 산 부모나 선배의 경험이나 지식도 자식이나 후배에게 큰 참고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요즈음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미래는 불확실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사물을 정확히 보려면 자기에게 맞는 안경이 필요하듯, 불확실한 미래를 자신있게 맞이하려면 자기만의 안경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고, 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적절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식간에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 현재를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 특히 대외의존도가 높고, 여러 강대국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세계정세와 기술, 시장수요의 변화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수적인 사항이다. 그리고 이런 외적요소와 더불어 흥미분야, 특기, 장단점, 건강 등 자기에 대한 성찰도 미래를 준비하는데 절대로 소홀히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지나간 과거는 어떤 작용을 하는지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변화가 극심하고 불안정한 미래이지만 거기에는 시대를 관통해 불변하는 법칙, 원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오래전에 쓰여진 동서양의 고전을 지금도 읽는 이유는 고전 속에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지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실패와 성공에 대한 분석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는데 필요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과거는 단순히 흘러간 옛날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열쇄인 것이다. 임천석 교수(사과대 국제무역학과)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광장의 중심에서 해방을 외치다 이준열 문화부 기자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작가 최인훈의 <광장>의 한 장면이다. 이제 많은 것이 달라진 환경에서 살게 될 신입생들은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법적으로는,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청소년의 지위를 상실하고 성인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 그중엔 참정권도 있다. 달라진 환경에서 자기계발과 학업, 사회생활을 동시에 하며 바쁜 생활로 성인의 첫 해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단지 쉬는 날 이었던 선거일 또한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이 날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깜빡이 없이 본론으로 넘어가자. 루이 알튀세르에 따르면, 단순히 법과 정치제도 등의 직접 사상에 간섭하는 장치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학교, 종교 따위의 단체와 미디어 등 모두가 이데올로기 장치다. 우리는 사회에서 행위하며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각인한다. 현재, 사회는 점차 복잡해졌고 사람들 간의 소통은 훨씬 자유롭다. 이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라는 흙에서, 심지어는 그 밖에서도 많은 이념이 탄생해 대립하기에 좋은 거름이 된다. 현재, 각 매체 및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지만 고립돼 있어 극단화되고 반지성적 배타주의를 띠는 점이 있다. 이런 흐름이 현실에 적용된 사례가 2016년 미국 대선이다.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로 부상하는 신좌파에 반발해 형성된 ‘대안 우파’ 세력이 트럼프를 당선시킨 것이다. <광장>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자. 주인공 이명준은 타락한 밀실 사회인 남한과 밀실없이 광장뿐인 북한 사회에 실망해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투신자살한다.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에게는 밀실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전쟁 도중 연인의 죽음으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사랑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이 소설은 죽은 연인과 아이를 의미하는 갈매기를 보고 바다라는 푸른 광장에 몸을 맡기며 끝을 맺는다. 이데올로기와 사랑의 갈등을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음하며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지금의 사회도 <광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1990년대 냉전이 종결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종결됐다고 흔히 얘기한다. 그러나 전쟁을 겪고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눠진 한반도는 그렇지 않다. 좌파와 우파는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정치판을 맴돌고 있고, 아직도 선동과 날조로 사람을 이데올로기에 가둬 평가한다. 이런 논쟁은 국가의 다른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조금이라도 이데올로기와 엮어서 정책을 비하해가며 국가발전을 저해한다. 사회가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념을 초월해 정책의 본질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준열 문화부 기자 index545@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83 Next / 83 GO / 83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