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보도]K-Cube 신축·냉난방기 교체·부처 이동 공사 마쳐 법학관 1층의 KU Grobal Lounge/출처 홍보실 지난 겨울방학 동안 학교 곳곳에서 공사가 이뤄졌다. △냉난방기 교체 △동물생명과학관 K-Cube 신축 △국제처 부처 이동 △새천년관 전산실 변경 등 새 단장을 마쳤다. 학우들이 새 학기에 교내 시설을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물생명과학관 1층에 학습휴게공간인 K-Cube가 지난 2월 말 완공됐다. K-Cube 조성에는 약 1.8억 원이 들었으며 개방 좌석 30석과 cube룸 5개가 조성되어있다. K-Cube는 지난해 오픈한 우리 대학의 개방형 학습공간으로 우리 대학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교내 곳곳에서 더워질 날씨를 대비해 냉난방 시설 공사도 이뤄졌다. 공학관 A동은 오래된 증기보일러를 철거하고 새로운 냉난방시설을 설치했고 강의실 석면철거, 상호교체를 진행해 교육환경을 개선했다. 경영관은 고장이 잦았던 4, 5층의 냉난방기를 교체했다. 냉난방기 공사와 함께 새천년관의 204호 자율실습전산실이 수업실습전산실로 바뀌어 이번 학기부터 수업전용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또한, 부처 이동도 있었다. 우리 대학 국제처가 국제학사에서 법학관 1층 104호, 105호로 이동했다. 새 사무공간은 전면이 유리문으로 돼 있는 개방형 첨단 업무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법학관 1층에는 KU Grobal Lounge도 마련됐다. KU Grobal Lounge는 우리 대학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개방형 학습공간으로 우리 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진 故 이순덕 할머니를 기려 개설됐다. 박가은 기자 qkrrkdms92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19학번을 맞이하는 글 이상구 시사부 기자 지난 15일, 매년 대한민국 전역을 들썩이게 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12년 혹은 그 이상 노력해왔기에 대입은 그들에게 꿀맛과 같은 보상일 것이다. 다들 한 번쯤 대학 합격 발표가 나길 초조히 기다리며 간절히 갈망하던 때가 있지 않았는가. 대학 공부가 필수적으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 수년간 고달팠던 우리였기에, 대학교란 이전 생활과는 달리 자유롭고 이상적인 사회로 여겨졌고 그 기대 또한 컸다. 다만, 현실은 이상과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다. 짧지만 길었던 1년을 경험 삼아, 그리고 곧 들어올 새내기 19학번을 맞이해 몇 자 적어 본다. 대학은 이전에 상상하던 공부환경과 다를 수 있다. 몇백만 원이라는 등록금을 냈지만 타 수강생에 밀려 원하는 강의를 신청하지 못하는 건 다반사며, 학업 분위기 또한 상상과는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본인이 학업 분위기가 좋은 학교에 다녔다면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인지할 것이다. 특히 저학년 수업의 경우 질 좋은 강의를 듣고 있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타 활동을 하는 학생이 많다. 또한, 빈번히 ‘출튀’(‘출석하고 튀기’의 준말)와 자체 휴강 등을 일삼으며 대학 생활을 일삼는 이도 있다. 학업적인 측면에서 나름의 선망을 갖고 입학했다면 이상과는 먼 모습에 당황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우리 학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보다 입학 성적대가 높은 학교도, 낮은 학교도 항상 겪고 있는 일이다. 곧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다. 입시 경쟁이 과열된 우리나라의 특성상 수시와 정시라는 대입 시스템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어렵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대학 졸업은 유독 쉽다. 이젠 옛말이지만, 모두 부모님께 “대학 가면 펑펑 놀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공부해”라는 말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한 청소년 대다수는 대학에 들어간 뒤 일종의 보상으로써 자신에게 마음껏 놀 자유를 준다. 한국의 불구덩이 같은 교육을 헤쳐온 이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20대 초창기, 스스로 꿈을 찾아 들어온 대학과 전공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든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선진국으로 뽑히는 캐나다의 경우, 대학입학시험이 따로 없다. 이에 대학 입학이 다른 나라보다 쉽지만, 졸업은 그만큼 어렵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또한, 유럽의 한 나라는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라면 의무적으로 몇 개월을 휴학하며 꿈을 찾는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꿈을 바탕으로 이후 진학할 대학에서 온전히 자기계발에 힘을 쏟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항상 장래희망이 뭔지를 적어냈다. 이것의 실질적인 첫 디딤발이 대학이라면, 그것에 맞게 사회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구 기자 shufsdhd@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우리대학 윤대진 연구팀, ‘식물이 추위를 견디는 원리 규명’ 우리대학 윤대진 연구팀이 추위에 노출된 식물이 염색체 구조를 스스로 변화시켜 스트레스를 견디는 과정을 규명했다. 생명공학분야에 권위 있는 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21일 자에 게시된 이번 연구는 염색질의 구조 조절이 식물 환경스트레스 저항에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최초로 밝혔다. 연구팀은 식물이 추위에 노출될 때 이를 인지하고 반응하는 단백질을 발견했고, 이를 '호스15(HOS15)'라고 명명했다. 연구 결과, 이 단백질은 추위를 인지하면 식물의 DNA를 감싼 염색질 구조를 바꾸도록 유도했고 이에 따라 실제 추위에 저항하는 유전자가 많아졌다. 윤 교수는 "이 연구는 염색질의 구조 조절이 식물 환경 스트레스 저항에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이라며 "식물생육 북방한계선과 관계없이 추운 지역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승주 기자 sj98lee@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비핵화, 저 멀리 험한 령을 넘어 김지용 (사과대·정외15) 학우 북핵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김일성은 1945년 일본 제국을 좌절시킨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실감하고 6.25전쟁 중에는 만주에 핵투하를 고려한다는 맥아더의 위협적인 주장을 몸소 체험한다. 전쟁 이후에는 소련에 핵 물리학도들을 파견하고 원자로를 수입하는 등 핵개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아울러 국제정세 역시 급변하고 있었다. 1956년 제 20차 공산당대회에서는 스탈린격하운동이 일어난다. 1959년에는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이 철수하고 얼마 뒤 1962년 쿠바 위기 당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소련을 두고 중소분쟁이 격화된다. 대국들의 분열을 바라보며 북한은 더 이상 냉전의 진영논리로만은 자국의 안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고 4대 군사노선 등을 통하여 자주국방을 도모했으니 그 수단으로 핵보유가 추진되었음은 자명하다. 1993년 북한의 NPT 탈퇴와 1994년 서울불바다 발언 등으로 촉발된 제 1차 핵 위기 사태는 영변 핵시설 폭격,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비화될 뻔 했으나 미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극적인 방북으로 봉합된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선군사상’을 내세우며 이전보다 더 과감한 방법으로 핵개발에 몰두한다. 김정일 시대에 나름대로의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낸 북한은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지난 2017년 말 드디어 ‘핵 무력 완성’을 공표한다. 지금 북한은 선(先) 종전선언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먼저 받은 다음의 비핵화 절차가 사리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라 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애초에 북한은 미국의 상대가 되질 못한다. 북한은 체제보장을, 미국은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거래를 원할 뿐이다. 선언은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말 그대로 ‘선언’이기에 정치, 수사적임에 불구하며 구속력이 떨어진다. 가령 미국이 종전선언을 먼저 수락한 상태에서 소위 북한이 ‘호박씨 까는 행동’을 보이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좀 더 대국다운 태도를 보이라며 미국을 탓한다. 그러나 비판의 화살을 미국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 역시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신뢰받지 못할 전력들을 쌓아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조급하다. 올해 11월에 중간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세울 성과가 필요하다. 분위기가 한창 좋았을 때는 노벨 평화상 이야기까지 오르내렸으니 지금이야 오죽할까. 최근 북한의 행보 역시 지난 세월에선 찾아 볼 수 없었던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상대방의 선의만을 믿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상술했다시피 핵이란 그들의 입장에서는 세대를 이어온 가업이자, 조국의 명운을 걸고 피눈물을 다 바쳐온 숙원사업, 그리고 그들을 자위하는 최후의 보루이기에 쉽게 내려놓을것이라는 과도한 낙관적 전망은 곤란하다. 김지용 (사과대·정외15)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여기는 꼭 입사하고 싶어요 사진 이지은 기자 지난 3~4일 우리대학이 새천년관 대공연장 및 우곡국제회의장에서 국내외 50여개 기업을 초청해 다양한 취업정보와 기회를 제공하고, 기업에게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18 KU 열린취업박람회’를 개최했다. 5~6일에는 학생들과 지역 청년들의 기업 직무별 업종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도를 높이고 기업 내 현직 직무담당자와 직접 상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KU직무박람회’를 개최했다. 이지은 기자 emily909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예디대 성추행 강 교수, 교수직 해임 결정 돼 2015년 이후 3년 간 본인이 지도교수를 맡은 제자 3명을 성추행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예디대 산업디자인과 강모 교수(52)가 1월 18일 1심에서 벌금 700만원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선고받아 학교 측으로 부터 최근 교수직 해임 처분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제자들을 지도 및 보호해야 할 신분임에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학생들의 신체를 만지며 추행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강 씨가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고 범행이 계획적이거나 악의적이지 않고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은 점과 강 씨의 동료 교수와 제자들이 작성한 탄원서와 본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이후 열심히 강의 활동을 한 점을 고려했다”며 양형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총학생회 청심은 해당 사건 관련 판결 이후 조속한 대응을 위해 지난 1월 20일 부총학생회장 등을 구성원으로 한 테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지속적인 사건 파악과 그에 따른 대응방안 모색에 나섰다. 조현규 총학생회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학생사회에서 지속적인 감시를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강력한 징계를 요구하여 학생 인권 보호와 수업의 질 보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한편 교무처 장용식 교무팀장은 “1심 벌금 선고 이후 직위해제가 이뤄졌고, 2월 26일 열린 징계 위원회에서 해당 교수에 대한 해임 의견이 결정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 장예빈 기자 dpqls18@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임기 후반기 맞이한 민상기 총장 인터뷰 지난 2016년 9월 취임한 민상기 총장이 임기의 절반인 2년이 지났다. <건대신문>은 지난 10일 민 총장이 2년간 추진한 사업을 점검하고 후반기 계획에 대해 물었다. Q.지난 2년에 대한 총장님의 소회를 간단히 몇 마디로 표현한다면 순식간에 지났다고 말하고 싶다. 노심초사 하면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2년이 금방 갔다. 사실 지금 대학이 처한 환경이 매우 어렵다. 입학정원 감소, 오히려 출산율 저하 등 인구구조가 변 하고 4차 산업혁명으로 산업구조도 바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는 우리대학이 명문대학 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혁신적으로 발돋움한다면 명문대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Q.혹 지난 임기2년을 평가한다면 10점 만점에 몇 점인가 스스로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총장으로서 평가는 우리대학 구성원들이 해줄 수 있 는 것 같다. 다만 처음 총장이 되며 하고자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어느 정도 실현됐는지 되 돌아본다면 50퍼센트 미만인 것 같다. 다양한 소통과 변화를 추구했지만 대학은 큰 조직이기 때문에 금방 변화를 주기는 어려웠다. 스스로 평가해볼 때는 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Q.먼저 학생들 입장에서 지난 2년 동안 우리대학에서 일어난 일 중 큰일을 꼽자면 학사구조개 편, 학제간 융합, 학과간 통합이다. 이와 관련 완전한 융합을 위한 계획이 있는가 현재의 학과중심 대학구조가 올바른가 생각해보면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대학에서 배운 전 공이 직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 단과대, 전공간의 융합, 새로운 전공도입을 통해 미래 사회에 맞는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 프라임사업을 통해 여러 가지 교육 과 연구 인프라 구축에 투자를 했다.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많이 해결됐는데 학과간의 밀접한 융합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면은 교수, 학생, 본부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전공이 시대에 맞는 것인지는 계속 고민 하고 노력해야 한다. Q.향후에는 몇몇 학과나 전공들에 대해 추가적인 통폐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어떤 기준으로 개편할 것인가 통합의 근본적인 방향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우리대학이 여러 학과를 통합하는 이유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콘텐츠를 제공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공을 만들기 위함이다. A전공 으로 입학을 할지라도 B, C학과를 부전공이나 연계전공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도와 주어야 한다고 본다. 학생들이 경계를 뛰어 넘어 다양한 과목을 공부해 시대에 맞는 인재가 됐으면 한다. 앞으로 추가적인 학과 통폐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으로, 학생들이 대학에서의 공부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개편할 예정이다. Q.취임하면서 학생대상 진로개발 장학금을 만드신다고 했다. 그 동안의 진행사항이나 성과가 있는가 원래 장학금은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알바를 병행하며 성적을 올리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장학 패러다임도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더 주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로개발장학금도 자기 역량을 개발하는 학생을 위해 만든 장학금이다. 학생들은 4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역량개발을 만들어줘야 한다. 여러 가지 취-창업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자기 개발하는 학생들에게 많이 지급을 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좋은 성과 내면 확대할 방침이다. Q.학생 복지를 고려해 등록금은 계속 동결되고 있으나 학생식당 식비와 기숙사비는 인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대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는가 등록금이 10년째 동결됐기 때문에 대학 재정도 사실 어렵다. 학생식당 식비와 기숙사비는 최저임금 인상과 주당 52시간 근로 정책 등으로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일 것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위해 도서관 시설환경개선사업, 휴식 공간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닥터정 해외탐방 프로그램처럼 후원을 받아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책정된 다른 예산을 줄여 새로운 장학금 예산을 만드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다양한 시설 개선과 복지가 학생 들에게 대체 만족의 통로가 됐으면 한다. Q.청년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높아져가는 우리대학이 경쟁력을 키우면서 학생들의 취업을 위해 노력할 점은 어떤 것이 있는가 1학년 때부터 창업, 코딩과 같은 4차산업혁명시대에 맞는 교양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전공간의 턱을 낮추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서도 취업할 수 있도록 여러 진로 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학점을 받을 수 있는 드림학기제 프로그램이 대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드림학기제와 같은 유연학기제도의 활성화는 학생들의 취-창업에 도움이 될 것이다. Q.취임하신 이후 강력히 추진하시는 정책 중 하나가 대학구성원 특히 학생들의 ‘인권’ 관련 내용이다. ‘인권센터’ 설립과 관련해 어떤 의미와 정책적 방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대학 구성원들의 인권보호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선 후배사이에, 혹은 남녀사이에서도 언어적인 폭력과 성차별 등이 발생한다. 교수나 직원들이 학생들을 과거 구시대적으로 대하는 무시하는 경우도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인권침해를 근절하기 위해 인권센터를 설립했다. 학생들은 미래사회를 이끌 주역인데 인권의 사각지대의 여러 행태 등을 몸에 베어나가면 사회에 나가서도 똑같이 하지 않겠나. Q.우리대학에서 공부하는유학생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양적증가에서 질적 증가로 바뀌어야 하는데 국제화에 대한 총장님의 의견이 있는가 예전에는 국제화 지표향상, 대학 재정 확보를 위해 무분별하게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외국인 유학생을 많이 받기는 했는데 학생들에 대한 관리가 부족했다. 일단 우리대학으로 오는 유학생들의 국적과 전공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특정학과에 많이 몰리게 될 경우에는 외국학생과 한국학생을 분반해서 수업하는 방식도 고민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 유학생이 많은데, 중국어 원어 강의 확대를 고려하고 있다. 앞으로도 외국인 담당 지도 교수에게 인센티브 지급을 통해 외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도를 독려할 것이다. Q.일부 인기 및 대형학과의 경우 아직 근본적인 수업권 개선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있다. 현재 파악된 문제점들과 그 대안이 궁금하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유사교과목이 많다는 것이다. 단과대, 학과별로 전수조사해서 필요한 만큼으로 줄여야 한다. 다른 한편 조사결과를 토대로 학생들의 수요가 많은 과목은 개설을 늘릴 것이다. 교수님들과의 소통하는 과정에서 우리학교의 모든 강의를 녹화를 한 번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른 대학 못지않은 e캠퍼스시스템에 모든 강의를 올리면 학생들이 복습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또한 수강신청하기 전에 e캠퍼스에서 미리 들어볼 수 있다.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필요한 과목, 원하는 과목을 조사해서 전체 학생들이 듣게끔 하고 싶다. e캠퍼스활성화, 무크강의, 강의 전수녹화 등을 추진해 학생들이 원하는 강의를 다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다. e캠퍼스 강의 업로드는 당장 올해 2학기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한 학기 3000개정도나 되는 강의를 다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학생들한테 인기 좋은 것, 전임 교수강의, 실습이나 계산이 뒤따르지 않는 강의 등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2학기에는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이를 토대로 2019년부터 대대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강의업로드가 추진되고 있는 e캠퍼스 수강신청 페이지 사진 Q.학생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취임 이전부터 강조했는데 평소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의 의견이나 바람을 파악하는지 이전의 교무위원회는 단과대 학장과 각 부처의 처장 중심이었다. 학생들과의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 총장 취임 이후 부총장 산하의 교학소통위원회를 만들었다. 부총장과 총학생회와의 소통을 통해 학교의 현황문제나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참고하고 있다. 가끔 총장에게 직접이 메일로 억울한 일이나 요구사항이 오는 경우도 있는데 비서실을 통해 직접 만나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를 통한 소통도 꾸준히 하고 있다. Q.전반기 2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달성하기 어려웠던 목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다고 보는가 본부에서 추진하는 여러 교육혁신사업등에 교육 현장에서 구체화되면 교육 주체인 교수들의 참여와 도움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전반기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운 면이 적지 않았 다. 이제는 미래지향적으로 우리 학생들이 맞이할 10년, 20년 뒤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예측해서 가르칠 수 있어야한다. 이에 대한 우리 교수님들의 깊은 성찰과 교육 내용과방식의 혁신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필요하다고 본다. Q.앞으로 남은 임기 2년 동안 주안점을 두고 추진할 일들을 우선순위를 두고 몇 가지 소개한다면 첫 번째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환경과 시설개선을 할 것이다. 특히 문과대학과 사회과학 대학의 교육환경을 대폭 개선할 것이다. 미국대학을 벤치마킹해서 만든 공부, 휴식, 토론의 공 간을 도서관 6층에 만들고 있다. 법학전문도서관 1층과 상허연구관 3층에도 만들 예정이다.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공과대학의 방치된 실험실과 강의실도 개선할 것이다. 두 번째는 교수 등의 강의를 녹화해서 학생들에게 e캠퍼스로 제공할 것이다. e캠퍼스활성화 를 통해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다전공, 연계 전공을 확대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학생들이 취-창업에서 경 쟁력을 갖추게 할 것이다. 네 번째는 외부 재정지원 사업을 통해 재정적 안정성 확보와 함께 장학금 확충 등을 도모 할 것이다. 상허기념도서관 환경개선사업으로 6층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다/ 사진 이승주 기자 Lounge 조성을 위해 법학관 1층이 정비 중이다 Q.마지막으로 2학기 개강을 맞이해 대학 구성원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교수들과 교직원은 미래인재를 가꾸는 마음으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도록 노력해주면 좋겠다. 대학 재정 어려움으로 교원복지 혜택 확대가 어렵지만 널리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학생들은 자기 전공을 고집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서 다양한 분야에 다가갔으면 좋겠다. 학교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찾아보고 자기 것을 찾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으면 한다. 졸업 후 사회 나가서, 그리고 먼 훗날 자식들이 대학을 갈 때 즈음에는 건국대학교가 소위 SKY 대학처럼 명문대학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 단 1-2년 내에 대학 레벨을 바꿀 수는 없다. 10년, 20년을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승주 기자 sj98lee@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우리대학, 이렇게 이끌겠습니다” 단과대학 학생회 선거 후보와 공약 문과대학 ▷문득 선거운동본부 정: 이예린(문과대·철학16) 부: 문미정(문과대·사학17) - 각종 행사 항시 대기 신고 부스, 음주문화 정립 - 장애학우 교내 등교 도우미 - 화장실 개선 (에티켓, 비상벨, 방향제 설치) - 여성의 날, 성년의 날, 예비군 소집일 이벤트 - 시사회 및 전시회 티켓 나눔 - 유학생 커뮤니티 증진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문과대 생활백서) ▷끌림 선거운동본부 정: 김윤희(문과대·국문17) 부: 김대민(문과대·지리17) - 화장실 공간 개선 - 인문뜨락 개선 - 강의동 202호에 신설되는 여자 휴게실에 생리대 진통제, 담요 등을 비치해 관리 - 새내기 새로 배움터 교외로 추진 - 유학생 정기 총회 추진 - 익명 문답 시스템 구축 상허생명대학 ▷S:NERGY 선거운동본부 정: 원창식(상생대·축식14) 부: 조현기(상생대·식량13) - 소통창구 활성화 - 투명한 재정관리 - 무인프린터기 설치 - 흡연구역 개선 및 장소 변경 - 대여사업 확대 - 여자휴게실 관리 및 침구 확충 - 엘리베이터 운행 방식 개선 사회과학대학 ▷굳건 선거운동본부 정: 정원석(사과대·국무16) 부: 최유진(사과대·정외16) - 학생회의 월별 지출일 내역 공개로 투명성 강화 - 사회과학대학 요람(사람) 제작 - 사회과학대학 새내기 맞이 주간, ‘사새맞주’ 진행 - 세부전공 선택화 추진 - 독립기구였던 인권위원회를 학생회로 편입해 기능 강화 - 상허연구관 세미나실 사회과학대학 학생에게만 개방 사범대학 ▷Page 선거운동본부 정: 김동회(사범대·교공16) 부: 변은아(사범대·영교17) - 학생휴게실 111호 운영(사범대학 1층 111호를 학생휴게실로 개편하여 학우들의 휴식을 보장) - 평가항목 및 평가방법 무단변경금지 요청 - 강의 세부점수 공개 요청 - 음악교육과 연습실 방음벽 점진적 설치 예술디자인대학 선거 연기 경영대학 ▷#경영대 선거운동본부 정: 최상현(경영대·경영14) 부: 조문주(경영대·경영17) - 경영대학 학우들을 위해서 각종 대회 및 연합 축제를 개최 - 학생회 회의록 및 결산안을 매달 투명하게 공개 - 전담교수님 지도 하에 운영되는 마케팅, 재무, 회계 세가지 분야 학회를 개설 - 대여 물품 사업 확대 - 가그린디스펜서를 화장실에 설치 - 흡연 구역을 외곽으로 옮기고 흡연부스 설치 - 후문위주의 제휴사업 건축대학 ▷BUILD UP 선거운동본부 정: 홍석환(건축대·건축14) 부: 장하빈(건축대·건축16) - 간이화방 운영 - 샤워실 개선 - 설계 분반 개선 - 오픈 스튜디오 개설 - 건축 프로젝트, 봉사활동 진행 ▷이음 선거운동본부 정: 강승관(건축대·건축13) 부: 이시현(건축대·건축16) - 스터디를 위한 열람실 신설 - 설계 환경 개선 및 설계 분반 문제 해결 - 타 단과대학과 실속있는 교류 - 실용적인 정보를 담은 취업북(BOOK)제공 - 지속적인 설문조사와 학과 정보 전달 KU융합과학기술원 ▷아우름 선거운동본부 정: 김근영(KIT·줄기세포14) 부: 양진혁(KIT·미래에너지17) - 사물함 이용 개선과 건물 출입 권한 등록 - 다양한 행사 개최와 소모임 및 동아리 활성화 - 자습공간 개선 및 확충 - KIT가이드북(학과·실험실 소개, 취업 자료 첨부) 제작 - 1:1익명 오픈 채팅방 이용해 정보 공유 - 월별 캘린더 구체화 (단과대 행사 및 회의 기재) 수의과대학 ▷비트윈 선거운동본부 정: 김원재(수의대·수의16) 부: 백민정(수의대·수의16) - 교수학생소통위원회 개최 - 강의실, 멀티미디어실 환경 개선 - 타 학과와의 교류 증진 - 학교 시설 및 제도에 대한 더 자세하고 주기적인 공지 및 설문조사 진행 - 공약 공모전 실시 - 화장실 및 샤워실 주기적인 몰래카메라 탐지 - 대여사업 물품 upgrade 이과대학 ▷이온 선거운동본부 정: 윤혜진(이과대·수학17) 부: 정승권(이과대·수학16) - 타 단과대와 연합축제·연합체육대회 기획 - 우산, 공학용계산기 등 대여사업확장 - 방학 중 농촌활동 프로그램 기획 - e-sports 종목 확대 및 활성화 - 창의관, 과학관에 청원함 설치 - 예비군 조식 사업 실시 공과대학 ▷온엔온 선거운동본부 정: 남영진(공과대·산업15) 부: 노재후(공과대·기계15) - 택배 대리수령&플러스친구 도착알림 - 몰래카메라 사전예방 - 공대스리가 종목 확대 및 활성화 - 전/편입생 오리엔테이션 실시 - 제휴식당 및 업체 확대 - 인·적성 교재 할인 - 신공학관 공간 활옹도 증대 - 교학소통위원회 소식 및 의견 전달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사설]권력기관 개혁, 정쟁 아닌 삶의 문제다 얼마 전부터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문제가 신문 1면과 방송 헤드라인에 자주 오르내린다. 정치권에선 이 사안을 두고 여야가 대치하면서 국회 일정이 공전하고 있다. 이런 정쟁 가운데 검찰과 경찰은 수사권을 누가 더 가져가고, 덜 가져가느냐를 둘러싸고 양보 없는 공방을 벌이고 있다. 이런 모습은 기시감(旣視感)이 크다. 십수 년 전부터 수사권 조정을 놓고 두 기관은 싸웠고, 국회는 그때그때의 시류를 살펴 법안을 손질하다, 돌려놓다를 거듭했다. 통상 대학생과 시민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관심 밖’이다. 수사권 조정이라는 이슈를 대하는 관념은 ‘흔한 정쟁의 소재’, ‘검찰과 경찰의 부단한 밥그릇 싸움’ 정도일 경우가 많다. 수사권 문제를 다루는 신문과 방송의 보도 역시 알아듣기 어려운 법률용어 투성이이거나 여야 또는 검경이 사활을 걸고 다투고 있다는 내용 정도로 압축된다. 일반인들로부터 ‘관심 밖’ 취급을 받는 게 어찌 보면 더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무관심이 심해질수록 일반인들이 손해를 본다는 점이 문제다. 권력기관의 힘 나누기가 신중한 검토 없이 이뤄지면, 부작용은 언제든 일상의 문제로 침투한다. 살아가면서 죄지을 일 없으니 괜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건의 피해자가 되거나 억울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은 자신의 준법의지와 무관할 때가 꽤 많다. 인터넷 사이트에 구직 글을 올렸다가 무역업체에서 수금사원을 찾는다고 해서 채용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무역업체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인출책’으로 지목돼 수사를 받았고, 공범으로 재판까지 넘겨졌다. 결국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의 1차 수사와 검찰의 2사 수사를 견뎌야 했다. 신분을 위장한 범인에게 현금 사기를 당했지만, 범인을 좁힐 단서라고는 거의 없는 피해자의 입장이 돼 보자. 검찰에 고소장을 냈는데, 사건은 어느새 경찰로 이관돼 있고 증거 부족으로 경찰이 사건을 종결해 버린 뒤로는 검찰에 재수사를 호소할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국회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절차로 넘어간 수사권 조정 법안이 엉성하게 통과되면 벌어질 만한 일이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 채 이른바 ‘권력의 하명수사’를 한다는 오명을 쓴 검찰을 개혁할 방안으로 논의된 방안 중 하나가 수사권 조정이다. 그런데 입법의 결과는, 소수의 비리 사건만이 아니라 법적 문제를 맞닥뜨린 서민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난다. 수사권 조정이 검찰의 힘을 빼는 쪽에 초점을 둘 게 아니라 국민의 삶과 권리 보호에 주안점을 둬야 하는 이유다. 수사권을 누가 더 가져가는지가 아니라 수사권 행사에서 권한 남용이 있는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억울한 피해자, 피의자가 없도록 사법절차 곳곳에서 경찰·검찰·법원의 권한을 배분하고, 견제하도록 하는 데 지혜를 모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권력기관 개혁을 정쟁 사안이나 이권 다툼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여기고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정치권이나 국가기관은 복잡하게 얽혀 풀기 어려운 정책 현안을 다룰 때 여론의 냉소와 무관심을 내심 반가워할지도 모른다. 정략적 셈법이나 무사안일 속에 엉성하게 땜질 된 법은 어느 순간 국가가 내 억울함을 합법적으로 외면하게 해 주는 제도가 돼 있을 수 있다.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파블로프의 초상 아침, 내가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서재에서였다. 나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으로 손잡이를 내리쳤다. 계속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바닥은 젖어있었다. 피였다. 시체가 있었다. 집주인이었다.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화약 냄새가 났다. 피가 바닥을 적셨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사이렌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집주인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는 내 재당숙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집주인 혹은 조쉬아 씨라 불렀다. 그가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서로 어색했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에 가깝다. 집주인은 다른 누군가와 오래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해 나름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다. 단지 그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람보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2편 이후의 람보를 싫어했다. 가끔 지역 방송에서는 람보 2를 틀어주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화를 내며 리모컨을 던졌다. 그의 목에는 선명하게 핏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가 했던 말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저건 거짓말이야. 만약 정말로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면, 절대 저렇게 행동할 수 없어! 저 망할 영화 제작자 놈들이 지금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의 집에 얹혀살았다. 유학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 차분한 사람이었다. 화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서웠다. 붉게 충혈된 눈, 쉬어버린 목소리. 그런 그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집주인은 일과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냈다. 내가 오기 전까지도 그는 집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 가정부를 고용했다고 했다. 그의 집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고정적인 수입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정부를 고용하는 건 사치였다. 적어도 당시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서재에는 낡은 턴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것을 틀었다. 얼마나 소리를 크게 했는지 아래층까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집주인은 소리에 민감했다. 아니 소리를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동차 엔진 소음, 불꽃놀이 폭죽 소리 등이 들릴 때마다. 그는 패닉에 빠졌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나 또한 괴로웠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어렸을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곳, 내 고향을 떠나 누님을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결국 오늘까지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누님 저는 내일이면 떠납니다. 아마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땅과 집을 모두 팔았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일지. 가족을 버리고 누님과 어딘가로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습니다. 그건 누님의 의지가 아닌 제 고집일 뿐이란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직접 만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럴 시간이 남아있질 않네요. 그래도 앞으로 계속 이 주소로 편지는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집주인의 집안은 대대로 지주였다. 그가 살던 일대의 대부분 땅이 그의 어머니의 소유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성적도 우수했다. 성격이 모나지 않아 대인 관계도 좋았다. 하지만 그가 이민을 가게 되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직접 내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좋았던 기억을 얘기해준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내가 좋았던 일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기만 했다. 그 과정은 부자연스러웠다. 누님, 혹시 파블로프를 기억하시나요? 아버지께서 제 생일선물이라서 집으로 데려왔던 그 늙고 못생긴 개 말입니다. 제가 그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면 누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저희를 바라보곤 하셨죠. 저는 그 개가 싫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있어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며 살아가길 포기하고 주인에게 복종한 채, 나이만 들어가는 비굴한 피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개랑 자주 놀아줬던 건, 그래야 누님께서 미소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파블로프가 죽었을 때, 제가 무덤 앞에서 울자 아버지는 “사내가 돼서 그깟 개새끼 한 마리 죽은 거 가지고 울고 있느냐.”라며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를 겁니다. 그때 제가 그때 울었던 이유는 이제 누님의 미소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란 사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우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학위라는 장식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숨기고 허세에 취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누군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이해한 척 공감하는 척하는 오만한 위선자, 그게 제가 당시에 제가 봐왔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종종 신문에서나 보던 사람들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까지 찾아왔던 걸 보면 나름 영향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나름 차관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니까요. 아무리 그가 도덕적으로는 틀린 사람이라도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거겠죠. 하지만 역시 저는 그 사람이 싫습니다. 그는 제가 누님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님과 떨어져 이곳에서 살게 한 장본이었습니다. 제가 누님과 같이 있던 것을 그에게 걸리는 날에는 방에 갇혀 매를 맞곤 했습니다. 그는 저를때리면서 ‘누님’ 같은 건, 저에게 필요 없다. 그런 건 쓸데없는 미련만 남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대들었고 그럼 그는 저를 옷장 안에 가둔 뒤 옷장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제발 꺼내 달라고 목이 갈라질 정도로 울부짖어도 그는 저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밖으로 나가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는 마치 자신은 자식을 사랑하는 다정한 아버지인 척 자식들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척, 입을 놀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인간의 유전자에서 누님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집주인의 침실 짐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열쇠 꾸러미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꾸러미에는 세 개의 열쇠가 걸려있었다. 모두 같은 열쇠였다. 하나는 긁힌 자국 많았지만 멀쩡했다. 나머지 두 개는 심하게 녹이 슬어 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였다. 방문 열쇠랑은 달랐다. 일단은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짐들을 모두 거실로 꺼냈다. 모든 방에 있는 그의 짐들을 거실로 꺼냈다. 그리고 그의 유품을 종류별로 구분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 그의 서재에서 놓고 온 짐이 있다는 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이 집의 다락방은 서재를 통해 가야 했다. 집주인은 내가 서재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불안해했다.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집주인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재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다락방의 존재로 잊어버렸다, 나는 책장을 옆으로 옮겼다. 그 뒤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나는 벽면에 전기 스위치를 켰다.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등은 상당히 밝았다. 교체한지 얼마 안된 듯했다. 다락방은 의외로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오래된 묵은 먼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여러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나는 상자들을 전부 거실로 옮겼다. 대부분의 상자들은 열어본 흔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한 상자만 열어본 흔적이 있었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였다. 상자들은 대부분 철로 되어 있었다. 녹이 슬어 열기 힘들었다.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앨범들과 일기장, 군복 그리고 전화번호 목록과 편지들이 있었다. 제가 성인이 되기 석 달 전, 저는 집을 나왔습니다. 제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죠. 누님 이곳은 제가 살던 곳이랑 너무나도 다릅니다. 적응하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더군요, 몇 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이곳에는 제가 있을 곳이 없었어요. 중학교에 갔을 때, 그곳에 저 같은 동양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일본인 한두 명 정도뿐, 대부분 흑인이나 백인이었죠. 그곳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찢어진 눈을 만들어 놀리는 건 양반이고, 대놓고 노란 원숭이라 부르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사라 하는 작자는 그런 것에 대해 말 몇 마디만 할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한국이 생각납니다. 좋은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겠지요. 한국에서는 누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 노력했습니다. 제가 뭔가 잘하는 게 있다면 그들도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공부와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운동을 잘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의지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시험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받았던 때였습니다. 제 성적이 공개되고 백인 아이들은 저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괴롭힘도 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그들은 저희 동양인들이 당연히 자기네들 보다 뒤떨어지는 인종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그들이 저를 괴롭힌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거겠죠. 그동안 자기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뒤처진 거니까. 정작 자신이 노력해서 이기는 건 쉽지 않고 그래서 대신 저를 몰아세우고 괴롭히면서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습니다. 그건 시작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그들은 제 왜소한 체구로는 팀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저를 거부했지만 저는 이미 그 팀에는 저랑 비슷한 체구의 선수가 이미 있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조금이라도 친해지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썼습니다. 스스로 혐오하는 행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을 걸어와 가식적인 짓거리들을 해댔습니다. 정말로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려 했지만 저는 꾹 참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저한테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아버지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결정을 할 수 있을 뿐. 제가 집을 나가려고 생각했던 건, 고등학생 때 부터였습니다, 저의 노력은 형식적인 거리만 좁혔을 뿐, 본질적인 것을 바꾸는 데에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힘을 잃고 과거의 영광과 주변의 시선에만 매몰되어 부패하고 있던 게, 그 이유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나갈 수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성년자였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법적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소한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하길 기다렸고 그 결과 이번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의 사진이었다. 그중에는 집주인도 있었다. 부대에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편지 뒤에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돼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군복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집주인이 개명하기 전 이름이었다. 편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집주인의 전 동료들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어떤 전쟁에 참여했던 것인지. 왜 그동안 그런 반응들을 했던 건지. 나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물었다. 알고 있었는지. 아버지는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 나는 다시 물었다.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대답했다. 이제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편지를 전부 읽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편지 뭉치를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군복을 집어 들었다. 군복은 오랜 세월 동안 꺼낸 적이 없는 듯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곳곳에 벌레들이 먹은 자국이 선명했다. 옷 자체도 많이 삭아있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옷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상자가 눈에 밟혔다. 자물쇠로 잠겨있는 상자였다. 나는 그 상자를 집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는 자물쇠 구명과 일치했다. 나는 열쇠를 돌렸다. 자물쇠가 풀렸다.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편지봉투들이 있었다. 곱게 잘 밀봉된 편지들 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혼자 살기 위해 1년간 돈을 모았습니다. 아버지 몰래 모은 돈이라서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집을 나가 혼자 살기에는 문제없는 금액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여관에서 한 달 정도 묵고 나니 제 생각과 수중에는 지폐 몇 장 정도만 남았습니다. 갑자기 일주일도 못 버틸 정도로 돈이 줄어들어 버리자 살기 위해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 군인 모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로 군에 지원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저는 조롱거리로 인종차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크게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죠. 그동안 받아온 차별로 인해 면역이 생긴 탓에 더 이상 그런 인종차별을 당해도 스스로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건 정말로 신기합니다. 자신의 잘못임에도 저항하고 반발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찍어 누르려 하지만 순응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얼마 안가 무시하고 지나가거든요. 여기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를 조롱했을 때 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부분 금방 싫증을 느끼고 그만뒀습니다, 물론 더 심하게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선을 넘어 저 외에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줬고 그로인해 오히려 비난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베트남 파병을 가기 전, 저는 훈련과 함께 저희가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베트남의 공산당들을 무찔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베트남에 가기 전까지 교육받은 것만이 옳다고 믿으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깨닫는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고부터 밖을 나갈 때는, 권총 한 자루를 가방 안에 넣어 다니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얻은 조그마한 리볼버인데 이게 가방 안에 있어야지만 조금이라도 덜 불안한 마음으로 밖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서도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끈을 단단하게 붙들고 다닙니다. 그러다 한 달 전쯤 가방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날 밤에 심한 감기에 걸려 다음 날 시내에서 약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지프차를 타고 있는 군인이 제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프차의 엔진 소리와 군복을 입은 군인에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니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리며 가방과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머리를 잡아 뜯기 시작했고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리 지기 전까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웠음에도 머리를 뜯고 있는 손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의 손이 제 가방을 향해 다가왔는데, 그 순간 반사적으로 가방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밀쳐냈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끌어안고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불안정한 호흡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움이 심해졌지만 만약에 멈췄다가는 가방을 빼앗길지도 몰랐기에 죽을힘을 다해 달렸고, 그렇게 계속 달리다 다리가 풀려 도로에 넘어질 때쯤,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급하게 가방 안을 확인 했는데, 다행히도 가방 안의 리볼버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습니다. 그러자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고 저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잠에 들자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더군요. 그의 그런 눈빛을 참을 수 없어서 손을 휘저으며 제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쳤고 그러자 아버지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손을 뻗는데 그 눈에는 차가운 살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무서워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 순간 검붉은 사람 형상들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 저를 붙잡았고 아버지의 손이 제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깼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방 안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변을 둘러보며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안도의 한숨이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세면대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라디오의 전파 소리, 윗집에서 생활하는 소리들이 살려달라고 외쳤던 전우들의 비명소리, 베트콩들과 꼬마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왔던 총성들로 변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도 사리지지 않고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댔죠. 바닥에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누님, 지금 제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주일 전 샤워를 하고 나와 방에 걸려 있는 거울을 봤습니다. 그런데 거울 안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제가 베트남에서 있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던 아버지가 거울 안에 있었습니다. 거울 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보다 추악하게 변한 몰골에 광기에 지쳐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눈으로 저를 노려보던 그의 모습이, 제발 사라져달라고 외쳐도 그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뜨리시며 쏘아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매일 매시간 마다 저를 노려보시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혼잣말로 힘들다고 한다거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간 아버지께 혼날 것 같아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정신적으로 한계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결국 집에 있는 거울을 전부 버렸습니다. 요즘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아 좋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하지만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기에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친구 관계는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누님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저는 그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들과 지냈던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가 저를 포기하게 함으로서 그에게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도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해 버리다니, 역시 저는 아버지의 우둔한 변모를 닮은 것 같습니다. 상자 안에 있던 것들 또한 편지였다. 하나하나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 통투를 살폈다. 그러다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편지지에는 받는 이의 주소가 없었다. 보내는 이의 주소는 적혀있었음에도 말이다. 힌트는 하나였다. 누님이라는 단어. 겉면에 적혀있던 그 단어뿐이었다. 그 외에는 겉에 드러난 힌트가 없었다. 나는 문구용 칼을 꺼냈다. 밀봉을 풀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럽게 밀랍을 뜯어냈다. 편지지가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편지지를 떨어뜨렸다. 누구에게 온 건지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앞으로 어디서 지낼 예정이니” “나야 뭐, 여기서 계속 지내야지.” “찝찝하지 않겠어? 그래도 사람이 죽었던 곳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리고 나도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 남아서 찾아봐야 할 게 생겼거든.” 아버지는 못마땅한 듯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아직 방학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물론 집주인 물건을 정리해야 하는 것도 있다. 나 말고는 그의 물건을 정리해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의 장례식 준비도 남아있다. 집주인이 결혼을 안 한 탓에 나 말고는 없었다. 내가 그의 마지막을 챙겨줘야 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내가 다른 집을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누님, 저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누님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도 제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살인마입니다. 이제 교회도 다니지 않습니다. 이제는 신이란 존재를 정의란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정의란 명분하에 죄 없는 많은 이들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어른, 아이들, 노인, 임산부 누구든 상관없이 상부에 명령에 따라 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교육받았고 모든 건 미국과 세계의 정의를 위해서라며 스스로 합리화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많은 미군들이 그래왔듯 저희가 했던 모든 행위가 합당했단 것을 인정받고 전쟁 영웅으로서 미국 국민들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행위들을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막연한 믿음만을 따랐던 것이죠. 이건 제가 처음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는 베트콩들이 숨어있다는 마을에 침입해 베트콩 들은 숨지 말고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베트콩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집집마다 쳐들어가 베트콩들을 어디에 숨겼냐고 추궁했습니다. 물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다수가 집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침입했던 집에는 어린아이 두 명과 어머니 그리고 노쇠한 노파만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울기만 하고 노파와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렸고 제 선임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그는 화를 내며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모두 쏴 죽였습니다. 총성과 함께 여자의 피가 제 얼굴에 튀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저는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악몽을 꿨습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들어오며 보이는 여자의 얼굴. 누님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에게서 누님의 얼굴이 겹쳐지더니 여자의 시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왔습니다. 걸을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고 제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자 피범벅이 되어 죽은 그녀의 아이들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대로 넘어졌고 여자가 제 목을 조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죽지 않았을 거야, 네가 우리를 죽인 거야. 모두 너 때문이야.”라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숨이 막혀오다 정신을 잃고 악몽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혹시나 아직 꿈인지 아님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목과 발목을 확인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악몽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마치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사실상 패전한 상태로 미국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를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기대했던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예와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저희에게 남겨진 것은 전쟁에서의 상처와 살인자라는 낙인뿐 이었습니다. 아무도 저희를 이해해주거나 공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멸시와 혐오 그리고 증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베트남 파병 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누님, 누님도 혹시 저를 살인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편지를 읽고 제가 행했던 일들로 인해 저를 혐오하게 되셨나요?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주세요. 누님마저 저를 부정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 그리고 정의를 얻어 올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해 일했습니다. 절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제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런 거라니,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왜 제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죠. 제발 누님 부탁입니다. 당신만은 저를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동정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미워하지만 말아주세요. 네, 맞아요. 저는 파블로프와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며 살아가길 포기하고 국가에 복종하며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상처를 끌어 앉고 살아왔고 앞으로 영겁의 시간 동안 죄책감을 짊어지고 속죄하며 살아갈 겁니다. 문득 누님이 전에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집마당에 있던 오래된 벚나무에 핀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벚꽃의 꽃망울보다, 힘을 다하고 죽어 아래로 떨어지는 벚꽃 잎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죽음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다음 날 누님이 갑자기 제 눈에서 사라져 버리실까 두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누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셨던 것인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서웠습니다. 누님께서 그런 말을 하신다는 것이. 그때 누님께 이런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누님은 벚꽃이 아닌 사람이라고. 그리고 사람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칠 때, 버거울 정도로 아름다운 생명력을 내뿜는다고. 하지만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어쩌면 아버지가 그러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지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누님께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 스스로 봐오고 경험한 것들이 있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끔찍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으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검붉은 덩어리가 될 뿐입니다. 인간이 가진 생명력과 넘치는 가능성이 일순간에 사라지며 공허함만이 그곳을 매우는 것, 그게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제발 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 걸어봤지만 여전했다. 상자에서 편지를 전부 꺼내자, 가장 안쪽에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은 상당히 오래된 듯했다.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색이 거의 벗겨져 있었다. 사진을 뒤집었다. 글자가 써져있었다. 겨우겨우 알아볼 수만 있는 수준이었다.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사진.’ 다른 건 없었다. 오직 그 한 줄뿐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나마 관찰할 수 있는 건 치마를 입은 소녀와 그 옆에 서있는 어린아이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둘이 누군지를. 이미 편지를 읽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사진 속 소녀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 소녀가 집주인에게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어머니라면 약간이라도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한테 문자가 왔다. 나는 편지 속 소녀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도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고 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물었다. 어머니는 없다고 대답했다. 집주인의 집은 예전부터 외가랑 교류가 없었다. 그게 이유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외가랑 교류를 했었다면 내가 그를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이 편지들을 원래 주인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편지봉투를 집었다. 마지막 편지였다. 저는 죽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특히 지금 같이 죄인, 괴물인 상태로 죽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만약에 죽는다면 사람으로서 죽고 싶었습니다. 누님 같은 아름답고 무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연옥에 가뒀습니다. 언젠가 제 죄를 용서받고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며 연옥 속에서 그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오늘로서 끝날 것 같습니다. 오늘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제 평생을 기다려 온 편지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지요. 내용은 누님도 아실 겁니다. 이 편지를 읽고 저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미련을 버렸습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괴물인 채로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한 혁명과 가능성을 위한 의지,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공허한 상태로 저는 스스로에게서 해방될 것입니다. 누님, 이기적이었던 제가 마지막으로 누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떠나면 누님은 저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제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평안하시길, 제가 알고 있는 그리고 지금 그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잉크가 마른지 얼마 안 된 편지 뒤에는 집주인이 남긴 마지막 전언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금 이 편지를 읽으신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누님이 읽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찢거나, 불에 태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누님께 이 편지를 전할 수 없을 겁니다. 누님과 누님의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말이죠.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더러운 피가 몸속에게 흐르고 있는 괴물이 오직 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으로서의 저의 모습을 잃어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사실은 오직 제 마음 속에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이것을 외부에 알리려 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 사람에게 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연관됐었던 모근 사람들에게 죄송했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특히 저로 인해 큰 부담을 지게 됐을 그 아이에게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이대로 괴물인 채로 죽는 것이 무섭지만 어차피 사람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찾아오지 않았다. 나 혼자뿐이었다. 편지는 그의 유언대로 했다. 전부 태웠다. 사진도 같이 태웠다. 그의 흔적들이 천천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보다 더 적막했다. 서재의 피는 전부 지웠다. 그의 짐들도 다시 다락방에 가져다 놓았다. 편지가 담겨있던 상자만 제외하고. 나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조쉬아 씨는 왜 굳이 편지를 다시 다락방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정말로 누군가 이걸 처분해 주길 원한 게 맞긴 한 걸까” 내가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모순만 늘어갔다. 나는 서재로 향했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펜과 종이를 집었다. 그리고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83 Next / 83 GO / 83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