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문화상 웹툰 부문 당선소감]날아오르는 배추나비처럼 배유진(예디대·커디18) ‘바다와 나비’는 김기림 시인의 시, ‘바다와 나비’를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의 시각으로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사실 자유주제라는 것은 아마 모든 창작가에게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기에 작품 주제 선정부터 참 막막했습니다. 그러다 저 자신이 표현하기에 제일 쉬운 것은 현재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선명했던 꿈이, 자꾸만 막연해지는 이 불안한 기분은 아마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불안감을 표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우연히 고등학교 문학 시간 훑듯이 배운 시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 분명 선생님께서는 근대 문명에 대한 지식인의 좌절, 또 무언가를 설명하셨는데, 저는 왜인지 항상 그 시가 가련한 나비의 동화처럼 들리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푸른색과 흰색의 강렬한 색채 대비, 거친 파도와 여린 배추 나비의 이미지, 이 모든게 제가 구상하고자 한 이야기와 맞아 떨어졌습니다. 작품 속 성난 바다는 녹록지 않은 현실을, 여린 나비는 날개가 찢어지도록 현실과 부딪히는 ‘우리’입니다. 아직 날개에 생채기 하나 없는 순수한 나비는, 푸른 물결이 그저 청 무밭인가, 하고 무모하게 뛰어듭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순수한 주인공을 등장시켜야 했습니다.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으로 젖어 있는, 이루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찬 인물 말입니다. 그런 여자 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은 남모르게 흠모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둘의 거리는 차츰 가까워집니다. 어쨌거나 이 부분은 비중이 크지 않기에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킨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원작 속 나비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역할이자, 여자 주인공, 즉 ‘우리’를 묵묵히 응원하는 누군가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실패를 겪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말이지요. 김기림 시인의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라는 표현이 이리 날카롭게 느껴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하고 현실적인 결말일 수 있어도, 그것이 이 웹툰의 결말일 뿐,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모진 현실에도 여러분이 낙담하지 않고 마지막 컷의 날아오르는 배추 나비처럼 계속해서 빛을 뿜어내며 날개를 펼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 만들어주신 건대신문사, 박 모 동기, 좋은 시를 소개해주신 조 선생님, 그리고 항상 제 든든한 편이 되어주는 가족, 친구 모두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배유진(예디대·커디18)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시 부문 심사평]통념을 넘어 새로운 인식 나희덕 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투고작들 중 「반쪽의 증명방법」 「바이르테」 「비둘기가 자살했다」 「사랑의 종교학」 「구름이 있는 저녁」 「진안」 「날」 「표선」 등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이 여덟 명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면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반쪽의 증명방법」과 「바이르테」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고, 당선작 한 편만을 선정해야 하는 심사자로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르테」는 간결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사랑을 둘러싼 미묘한 지점들을 짚어낸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일교차로 신기루가 될까”라는 문장처럼 서로 어긋나면서도 미묘하게 합쳐지는 둘의 관계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타자를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이 물기어린 언어는 매력적이지만 때론 지나치게 매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치나 감각을 넘어 좀더 깊이 있는 사유가 뒷받침되면 좋겠다. 그에 비해 당선작으로 뽑은 「반쪽의 증명방법」외 2편은 얼핏 소박하고 어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문장의 밀도가 느껴지고, 시적 대상에 대한 통념을 넘어 새로운 인식이 드러난다. “너는 등이 있는 생물이야 / 라고 네가 말하면 / 등이 생겼다”와 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시작해 후반부에 이르면 “등이 없는 생물의 / 생장점을 자극해서 / 등을 태어나게” 한다. 이처럼 끈질긴 관찰과 사유의 과정이 세 편 모두에 충분히 담겨 있어 시적 역량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멋진 시를 계속 써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시 부문 당선작]반쪽의 증명방법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너는 등이 있는 생물이야 라고 네가 말하면 등이 생겼다 몸이 따뜻하다고 말하면 여름이었다 등이 생기고 나서 눕는 게 불편해진다 어떻게 이불을 덮어도 무방비였다 팔이 차츰 등에 포함되기 시작하면 나는 등이 있는 생물 서로의 척추가 가지런하다 불편하게 누운 몸이 따뜻해서 욕창이 생긴다 등에서부터 등이 끝나면 어깨가 될 수 있니 등을 구부리고 날개뼈가 튀어나온다 날 수도 없는 것인데도 등이 있고 날개뼈가 있고 손이 닿을 수 없는 몸이 있다 욕창이 태어나는 곳에서 어깨의 뒤쪽까지 모두 등이 되었다 등이 없는 생물의 생장점을 자극해서 등을 태어나게 해야지 기대는 곳 눕는 장소 아무리 씻어도 욕창이 다시 생기는 누군가를 빌려서 닦아달라고 씻겨달라고 지워달라고 부탁하는 것 고개를 숙인 식물들은 등을 가지고 있다 등을 가진 생물이다 내가 고개를 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등을 보여주면서 몸이 따뜻해서 등이 넓어지고 있다 게으르다 땀띠처럼 붉어지다가도 몸을 뒤집으면 가슴 밑으로 등이 생겼다 일어서면 등이 없어지고 욕창은 온 몸에 퍼진다 발등을 신발로 가리고 춥다고 말하면 겨울이 될 줄 알았는데 창문을 열어도 여름이었다 계절이 천천히 어긋나고 있다 정재호(문과대·국문15)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시 부문 당선소감]어떤 시도 시가 아닐때 정재호(문과대·국문15) 반쪽의 증명방법이 상을 받았습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6년을 써왔기 때문일까요. 사실 시는 상을 받은 텍스트가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이 소감문입니다. 그렇게 믿기로 했습니다. 2013년이 시작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자살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가 그렇게 시를 좋아했었나,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러나 좋아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서 시를 씁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모든 텍스트들은 시가 아니거든요. 시를 쓴다고 하면서 시를 하나도 모릅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다니면서도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6년을 써 왔는데 상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으면 시일까요? 시로 인정되는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잘 아는 것 하나 없이 시를 쓰고,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시를 쓰고, 시가 아닌 것들을 씁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시, 시인, 시인, 시. 어디부터 시인이고 어디까지 시일까요.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말이 떠오릅니다. 시의 산은 높고 안개가 잔뜩 껴서 오른다고,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 왔는지, 오르막길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시의 산이라는 건 산일까요, 산이 맞다면 과연 “시”의 산일까요? 어떤 말을 소감으로 써야 할지 몰라 시를 썼습니다. 시라고 생각하고 쓰면 그 순간부터 시가 아니게 되니까요. 저는 시를 쓰고 사는 사람입니다. 시를 쓰고, 국어국문학과에 다닙니다. 자취방에는 어제 마신 술의 냄새가 나고, 조명을 전구색으로 바꿔서 조금은 따뜻합니다. 겨울입니다. 다들 따뜻하시길 바랍니다. 정재호(문과대·국문15)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 심사평]명작이 탄생할 가능성 김홍신 작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으로, 한글의 웅혼한 숨결을 기억하는 해의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부분 응모작은 20편이었다. 예부터 문학은 시대를 조명하고 비평하며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학은 시대정신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문학에게 인생의 해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생에 대한 강한 질문을 던지고 성찰을 요구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대체로 문화예술과 스포츠인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대체로 문화예술이라고 한다. 문인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기에 고장 나기 쉬운 인생을 치유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neophilia)이 인류를 지구의 주인으로 만든 동력이었을 것이다. 호기심이 곧 창조정신이기 때문이다. 불면증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 세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한 문학도들의 넘치는 이야깃거리를 마음모아 읽었다. 박수를 천둥처럼 치고 싶었다. ‘물’은 섬세한 문장으로 범상치 않은 사건을 예견하게 하는 흡인력을 보였다. 주인공에게 백상아리 이빨이 필요하다는 영국인의 주장에 반응하는 추리기법과 실험정신이 매우 돋보였다. 상상력과 필력이 좋으나 마무리에서 좀 더 천착하는 작가 정신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랑소와즈’는 매우 서정적 문체와 문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괄호 안에 한글 대화를 ‘붙어’라고 쓴 것이 썩 어울리지 않았으나 스케치 여행하는 주인공의 관찰력과 의식체계의 소설적 정밀함을 잘 보여주었다. 인간의 본능과 사람냄새를 적절하게 묘사해서 잔잔한 호숫가를 가슴에 새기게 하는 능력을 보였다. ‘파블로프의 초상’은 재당숙 조쉬아를 집주인이라 부르는 주인공이 총성에 놀라는 장면부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작법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상흔과 트라우마의 대비가 절묘하게 그려졌다. 심리적 갈등을 사건의 흐름과 어울리게 한 기법도 뛰어났다. ‘깐밤’은 해원에게 남겨진 기억하기 싫은 추억과 트라우마는 상상력을 높게 끌어올린 수작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모의 죽음과 무당집을 드나들 수 밖에 없는 노인의 운명론과 주인공의 갈등구조가 매우 도드라졌다. 우연찮은 석현과의 인연으로 트라우마가 해소되는 애잔한 연애담이 참 좋다. 심사할 때마다 나는 내 젊은 시절의 낙선에 대한 갈증을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응모작을 정성으로 읽고 당선자보다 아쉽게 낙선한 문학도를 위한 기도를 하곤 한다. 고심 끝에 ‘파블로프의 초상’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명작을 탄생시킬 가능성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김홍신 작가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파블로프의 초상 아침, 내가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서재에서였다. 나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으로 손잡이를 내리쳤다. 계속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바닥은 젖어있었다. 피였다. 시체가 있었다. 집주인이었다.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화약 냄새가 났다. 피가 바닥을 적셨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사이렌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집주인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는 내 재당숙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집주인 혹은 조쉬아 씨라 불렀다. 그가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서로 어색했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에 가깝다. 집주인은 다른 누군가와 오래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해 나름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다. 단지 그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람보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2편 이후의 람보를 싫어했다. 가끔 지역 방송에서는 람보 2를 틀어주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화를 내며 리모컨을 던졌다. 그의 목에는 선명하게 핏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가 했던 말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저건 거짓말이야. 만약 정말로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면, 절대 저렇게 행동할 수 없어! 저 망할 영화 제작자 놈들이 지금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의 집에 얹혀살았다. 유학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 차분한 사람이었다. 화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서웠다. 붉게 충혈된 눈, 쉬어버린 목소리. 그런 그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집주인은 일과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냈다. 내가 오기 전까지도 그는 집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 가정부를 고용했다고 했다. 그의 집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고정적인 수입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정부를 고용하는 건 사치였다. 적어도 당시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서재에는 낡은 턴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것을 틀었다. 얼마나 소리를 크게 했는지 아래층까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집주인은 소리에 민감했다. 아니 소리를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동차 엔진 소음, 불꽃놀이 폭죽 소리 등이 들릴 때마다. 그는 패닉에 빠졌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나 또한 괴로웠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어렸을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곳, 내 고향을 떠나 누님을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결국 오늘까지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누님 저는 내일이면 떠납니다. 아마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땅과 집을 모두 팔았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일지. 가족을 버리고 누님과 어딘가로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습니다. 그건 누님의 의지가 아닌 제 고집일 뿐이란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직접 만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럴 시간이 남아있질 않네요. 그래도 앞으로 계속 이 주소로 편지는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집주인의 집안은 대대로 지주였다. 그가 살던 일대의 대부분 땅이 그의 어머니의 소유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성적도 우수했다. 성격이 모나지 않아 대인 관계도 좋았다. 하지만 그가 이민을 가게 되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직접 내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좋았던 기억을 얘기해준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내가 좋았던 일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기만 했다. 그 과정은 부자연스러웠다. 누님, 혹시 파블로프를 기억하시나요? 아버지께서 제 생일선물이라서 집으로 데려왔던 그 늙고 못생긴 개 말입니다. 제가 그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면 누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저희를 바라보곤 하셨죠. 저는 그 개가 싫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있어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며 살아가길 포기하고 주인에게 복종한 채, 나이만 들어가는 비굴한 피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개랑 자주 놀아줬던 건, 그래야 누님께서 미소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파블로프가 죽었을 때, 제가 무덤 앞에서 울자 아버지는 “사내가 돼서 그깟 개새끼 한 마리 죽은 거 가지고 울고 있느냐.”라며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를 겁니다. 그때 제가 그때 울었던 이유는 이제 누님의 미소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란 사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우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학위라는 장식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숨기고 허세에 취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누군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이해한 척 공감하는 척하는 오만한 위선자, 그게 제가 당시에 제가 봐왔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종종 신문에서나 보던 사람들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까지 찾아왔던 걸 보면 나름 영향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나름 차관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니까요. 아무리 그가 도덕적으로는 틀린 사람이라도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거겠죠. 하지만 역시 저는 그 사람이 싫습니다. 그는 제가 누님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님과 떨어져 이곳에서 살게 한 장본이었습니다. 제가 누님과 같이 있던 것을 그에게 걸리는 날에는 방에 갇혀 매를 맞곤 했습니다. 그는 저를때리면서 ‘누님’ 같은 건, 저에게 필요 없다. 그런 건 쓸데없는 미련만 남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대들었고 그럼 그는 저를 옷장 안에 가둔 뒤 옷장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제발 꺼내 달라고 목이 갈라질 정도로 울부짖어도 그는 저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밖으로 나가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는 마치 자신은 자식을 사랑하는 다정한 아버지인 척 자식들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척, 입을 놀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인간의 유전자에서 누님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집주인의 침실 짐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열쇠 꾸러미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꾸러미에는 세 개의 열쇠가 걸려있었다. 모두 같은 열쇠였다. 하나는 긁힌 자국 많았지만 멀쩡했다. 나머지 두 개는 심하게 녹이 슬어 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였다. 방문 열쇠랑은 달랐다. 일단은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짐들을 모두 거실로 꺼냈다. 모든 방에 있는 그의 짐들을 거실로 꺼냈다. 그리고 그의 유품을 종류별로 구분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 그의 서재에서 놓고 온 짐이 있다는 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이 집의 다락방은 서재를 통해 가야 했다. 집주인은 내가 서재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불안해했다.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집주인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재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다락방의 존재로 잊어버렸다, 나는 책장을 옆으로 옮겼다. 그 뒤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나는 벽면에 전기 스위치를 켰다.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등은 상당히 밝았다. 교체한지 얼마 안된 듯했다. 다락방은 의외로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오래된 묵은 먼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여러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나는 상자들을 전부 거실로 옮겼다. 대부분의 상자들은 열어본 흔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한 상자만 열어본 흔적이 있었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였다. 상자들은 대부분 철로 되어 있었다. 녹이 슬어 열기 힘들었다.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앨범들과 일기장, 군복 그리고 전화번호 목록과 편지들이 있었다. 제가 성인이 되기 석 달 전, 저는 집을 나왔습니다. 제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죠. 누님 이곳은 제가 살던 곳이랑 너무나도 다릅니다. 적응하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더군요, 몇 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이곳에는 제가 있을 곳이 없었어요. 중학교에 갔을 때, 그곳에 저 같은 동양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일본인 한두 명 정도뿐, 대부분 흑인이나 백인이었죠. 그곳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찢어진 눈을 만들어 놀리는 건 양반이고, 대놓고 노란 원숭이라 부르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사라 하는 작자는 그런 것에 대해 말 몇 마디만 할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한국이 생각납니다. 좋은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겠지요. 한국에서는 누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 노력했습니다. 제가 뭔가 잘하는 게 있다면 그들도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공부와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운동을 잘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의지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시험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받았던 때였습니다. 제 성적이 공개되고 백인 아이들은 저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괴롭힘도 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그들은 저희 동양인들이 당연히 자기네들 보다 뒤떨어지는 인종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그들이 저를 괴롭힌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거겠죠. 그동안 자기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뒤처진 거니까. 정작 자신이 노력해서 이기는 건 쉽지 않고 그래서 대신 저를 몰아세우고 괴롭히면서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습니다. 그건 시작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그들은 제 왜소한 체구로는 팀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저를 거부했지만 저는 이미 그 팀에는 저랑 비슷한 체구의 선수가 이미 있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조금이라도 친해지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썼습니다. 스스로 혐오하는 행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을 걸어와 가식적인 짓거리들을 해댔습니다. 정말로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려 했지만 저는 꾹 참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저한테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아버지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결정을 할 수 있을 뿐. 제가 집을 나가려고 생각했던 건, 고등학생 때 부터였습니다, 저의 노력은 형식적인 거리만 좁혔을 뿐, 본질적인 것을 바꾸는 데에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힘을 잃고 과거의 영광과 주변의 시선에만 매몰되어 부패하고 있던 게, 그 이유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나갈 수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성년자였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법적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소한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하길 기다렸고 그 결과 이번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의 사진이었다. 그중에는 집주인도 있었다. 부대에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편지 뒤에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돼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군복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집주인이 개명하기 전 이름이었다. 편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집주인의 전 동료들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어떤 전쟁에 참여했던 것인지. 왜 그동안 그런 반응들을 했던 건지. 나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물었다. 알고 있었는지. 아버지는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 나는 다시 물었다.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대답했다. 이제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편지를 전부 읽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편지 뭉치를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군복을 집어 들었다. 군복은 오랜 세월 동안 꺼낸 적이 없는 듯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곳곳에 벌레들이 먹은 자국이 선명했다. 옷 자체도 많이 삭아있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옷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상자가 눈에 밟혔다. 자물쇠로 잠겨있는 상자였다. 나는 그 상자를 집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는 자물쇠 구명과 일치했다. 나는 열쇠를 돌렸다. 자물쇠가 풀렸다.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편지봉투들이 있었다. 곱게 잘 밀봉된 편지들 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혼자 살기 위해 1년간 돈을 모았습니다. 아버지 몰래 모은 돈이라서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집을 나가 혼자 살기에는 문제없는 금액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여관에서 한 달 정도 묵고 나니 제 생각과 수중에는 지폐 몇 장 정도만 남았습니다. 갑자기 일주일도 못 버틸 정도로 돈이 줄어들어 버리자 살기 위해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 군인 모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로 군에 지원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저는 조롱거리로 인종차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크게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죠. 그동안 받아온 차별로 인해 면역이 생긴 탓에 더 이상 그런 인종차별을 당해도 스스로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건 정말로 신기합니다. 자신의 잘못임에도 저항하고 반발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찍어 누르려 하지만 순응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얼마 안가 무시하고 지나가거든요. 여기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를 조롱했을 때 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부분 금방 싫증을 느끼고 그만뒀습니다, 물론 더 심하게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선을 넘어 저 외에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줬고 그로인해 오히려 비난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베트남 파병을 가기 전, 저는 훈련과 함께 저희가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베트남의 공산당들을 무찔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베트남에 가기 전까지 교육받은 것만이 옳다고 믿으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깨닫는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고부터 밖을 나갈 때는, 권총 한 자루를 가방 안에 넣어 다니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얻은 조그마한 리볼버인데 이게 가방 안에 있어야지만 조금이라도 덜 불안한 마음으로 밖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서도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끈을 단단하게 붙들고 다닙니다. 그러다 한 달 전쯤 가방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날 밤에 심한 감기에 걸려 다음 날 시내에서 약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지프차를 타고 있는 군인이 제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프차의 엔진 소리와 군복을 입은 군인에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니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리며 가방과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머리를 잡아 뜯기 시작했고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리 지기 전까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웠음에도 머리를 뜯고 있는 손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의 손이 제 가방을 향해 다가왔는데, 그 순간 반사적으로 가방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밀쳐냈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끌어안고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불안정한 호흡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움이 심해졌지만 만약에 멈췄다가는 가방을 빼앗길지도 몰랐기에 죽을힘을 다해 달렸고, 그렇게 계속 달리다 다리가 풀려 도로에 넘어질 때쯤,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급하게 가방 안을 확인 했는데, 다행히도 가방 안의 리볼버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습니다. 그러자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고 저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잠에 들자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더군요. 그의 그런 눈빛을 참을 수 없어서 손을 휘저으며 제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쳤고 그러자 아버지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손을 뻗는데 그 눈에는 차가운 살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무서워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 순간 검붉은 사람 형상들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 저를 붙잡았고 아버지의 손이 제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깼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방 안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변을 둘러보며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안도의 한숨이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세면대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라디오의 전파 소리, 윗집에서 생활하는 소리들이 살려달라고 외쳤던 전우들의 비명소리, 베트콩들과 꼬마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왔던 총성들로 변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도 사리지지 않고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댔죠. 바닥에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누님, 지금 제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주일 전 샤워를 하고 나와 방에 걸려 있는 거울을 봤습니다. 그런데 거울 안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제가 베트남에서 있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던 아버지가 거울 안에 있었습니다. 거울 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보다 추악하게 변한 몰골에 광기에 지쳐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눈으로 저를 노려보던 그의 모습이, 제발 사라져달라고 외쳐도 그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뜨리시며 쏘아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매일 매시간 마다 저를 노려보시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혼잣말로 힘들다고 한다거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간 아버지께 혼날 것 같아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정신적으로 한계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결국 집에 있는 거울을 전부 버렸습니다. 요즘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아 좋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하지만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기에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친구 관계는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누님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저는 그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들과 지냈던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가 저를 포기하게 함으로서 그에게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도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해 버리다니, 역시 저는 아버지의 우둔한 변모를 닮은 것 같습니다. 상자 안에 있던 것들 또한 편지였다. 하나하나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 통투를 살폈다. 그러다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편지지에는 받는 이의 주소가 없었다. 보내는 이의 주소는 적혀있었음에도 말이다. 힌트는 하나였다. 누님이라는 단어. 겉면에 적혀있던 그 단어뿐이었다. 그 외에는 겉에 드러난 힌트가 없었다. 나는 문구용 칼을 꺼냈다. 밀봉을 풀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럽게 밀랍을 뜯어냈다. 편지지가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편지지를 떨어뜨렸다. 누구에게 온 건지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앞으로 어디서 지낼 예정이니” “나야 뭐, 여기서 계속 지내야지.” “찝찝하지 않겠어? 그래도 사람이 죽었던 곳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리고 나도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 남아서 찾아봐야 할 게 생겼거든.” 아버지는 못마땅한 듯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아직 방학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물론 집주인 물건을 정리해야 하는 것도 있다. 나 말고는 그의 물건을 정리해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의 장례식 준비도 남아있다. 집주인이 결혼을 안 한 탓에 나 말고는 없었다. 내가 그의 마지막을 챙겨줘야 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내가 다른 집을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누님, 저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누님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도 제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살인마입니다. 이제 교회도 다니지 않습니다. 이제는 신이란 존재를 정의란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정의란 명분하에 죄 없는 많은 이들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어른, 아이들, 노인, 임산부 누구든 상관없이 상부에 명령에 따라 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교육받았고 모든 건 미국과 세계의 정의를 위해서라며 스스로 합리화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많은 미군들이 그래왔듯 저희가 했던 모든 행위가 합당했단 것을 인정받고 전쟁 영웅으로서 미국 국민들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행위들을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막연한 믿음만을 따랐던 것이죠. 이건 제가 처음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는 베트콩들이 숨어있다는 마을에 침입해 베트콩 들은 숨지 말고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베트콩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집집마다 쳐들어가 베트콩들을 어디에 숨겼냐고 추궁했습니다. 물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다수가 집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침입했던 집에는 어린아이 두 명과 어머니 그리고 노쇠한 노파만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울기만 하고 노파와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렸고 제 선임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그는 화를 내며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모두 쏴 죽였습니다. 총성과 함께 여자의 피가 제 얼굴에 튀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저는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악몽을 꿨습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들어오며 보이는 여자의 얼굴. 누님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에게서 누님의 얼굴이 겹쳐지더니 여자의 시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왔습니다. 걸을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고 제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자 피범벅이 되어 죽은 그녀의 아이들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대로 넘어졌고 여자가 제 목을 조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죽지 않았을 거야, 네가 우리를 죽인 거야. 모두 너 때문이야.”라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숨이 막혀오다 정신을 잃고 악몽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혹시나 아직 꿈인지 아님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목과 발목을 확인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악몽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마치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사실상 패전한 상태로 미국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를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기대했던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예와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저희에게 남겨진 것은 전쟁에서의 상처와 살인자라는 낙인뿐 이었습니다. 아무도 저희를 이해해주거나 공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멸시와 혐오 그리고 증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베트남 파병 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누님, 누님도 혹시 저를 살인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편지를 읽고 제가 행했던 일들로 인해 저를 혐오하게 되셨나요?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주세요. 누님마저 저를 부정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 그리고 정의를 얻어 올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해 일했습니다. 절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제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런 거라니,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왜 제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죠. 제발 누님 부탁입니다. 당신만은 저를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동정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미워하지만 말아주세요. 네, 맞아요. 저는 파블로프와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며 살아가길 포기하고 국가에 복종하며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상처를 끌어 앉고 살아왔고 앞으로 영겁의 시간 동안 죄책감을 짊어지고 속죄하며 살아갈 겁니다. 문득 누님이 전에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집마당에 있던 오래된 벚나무에 핀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벚꽃의 꽃망울보다, 힘을 다하고 죽어 아래로 떨어지는 벚꽃 잎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죽음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다음 날 누님이 갑자기 제 눈에서 사라져 버리실까 두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누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셨던 것인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서웠습니다. 누님께서 그런 말을 하신다는 것이. 그때 누님께 이런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누님은 벚꽃이 아닌 사람이라고. 그리고 사람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칠 때, 버거울 정도로 아름다운 생명력을 내뿜는다고. 하지만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어쩌면 아버지가 그러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지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누님께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 스스로 봐오고 경험한 것들이 있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끔찍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으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검붉은 덩어리가 될 뿐입니다. 인간이 가진 생명력과 넘치는 가능성이 일순간에 사라지며 공허함만이 그곳을 매우는 것, 그게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제발 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 걸어봤지만 여전했다. 상자에서 편지를 전부 꺼내자, 가장 안쪽에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은 상당히 오래된 듯했다.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색이 거의 벗겨져 있었다. 사진을 뒤집었다. 글자가 써져있었다. 겨우겨우 알아볼 수만 있는 수준이었다.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사진.’ 다른 건 없었다. 오직 그 한 줄뿐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나마 관찰할 수 있는 건 치마를 입은 소녀와 그 옆에 서있는 어린아이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둘이 누군지를. 이미 편지를 읽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사진 속 소녀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 소녀가 집주인에게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어머니라면 약간이라도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한테 문자가 왔다. 나는 편지 속 소녀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도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고 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물었다. 어머니는 없다고 대답했다. 집주인의 집은 예전부터 외가랑 교류가 없었다. 그게 이유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외가랑 교류를 했었다면 내가 그를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이 편지들을 원래 주인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편지봉투를 집었다. 마지막 편지였다. 저는 죽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특히 지금 같이 죄인, 괴물인 상태로 죽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만약에 죽는다면 사람으로서 죽고 싶었습니다. 누님 같은 아름답고 무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연옥에 가뒀습니다. 언젠가 제 죄를 용서받고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며 연옥 속에서 그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오늘로서 끝날 것 같습니다. 오늘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제 평생을 기다려 온 편지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지요. 내용은 누님도 아실 겁니다. 이 편지를 읽고 저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미련을 버렸습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괴물인 채로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한 혁명과 가능성을 위한 의지,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공허한 상태로 저는 스스로에게서 해방될 것입니다. 누님, 이기적이었던 제가 마지막으로 누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떠나면 누님은 저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제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평안하시길, 제가 알고 있는 그리고 지금 그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잉크가 마른지 얼마 안 된 편지 뒤에는 집주인이 남긴 마지막 전언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금 이 편지를 읽으신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누님이 읽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찢거나, 불에 태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누님께 이 편지를 전할 수 없을 겁니다. 누님과 누님의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말이죠.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더러운 피가 몸속에게 흐르고 있는 괴물이 오직 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으로서의 저의 모습을 잃어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사실은 오직 제 마음 속에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이것을 외부에 알리려 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 사람에게 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연관됐었던 모근 사람들에게 죄송했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특히 저로 인해 큰 부담을 지게 됐을 그 아이에게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이대로 괴물인 채로 죽는 것이 무섭지만 어차피 사람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찾아오지 않았다. 나 혼자뿐이었다. 편지는 그의 유언대로 했다. 전부 태웠다. 사진도 같이 태웠다. 그의 흔적들이 천천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보다 더 적막했다. 서재의 피는 전부 지웠다. 그의 짐들도 다시 다락방에 가져다 놓았다. 편지가 담겨있던 상자만 제외하고. 나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조쉬아 씨는 왜 굳이 편지를 다시 다락방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정말로 누군가 이걸 처분해 주길 원한 게 맞긴 한 걸까” 내가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모순만 늘어갔다. 나는 서재로 향했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펜과 종이를 집었다. 그리고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소감]제 당선소감은 건너뛰셔도 상관없습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저는 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공대생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공대생이 소설을 쓰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잖아. 네 맞습니다. 공대생이 소설을 쓴다고 해서 대단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공대생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조금 특이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쓰게 된 계기는 작년 2학기에 문화콘텐츠 학과 한소진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였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소설을 쓰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저는 본격적으로 제 진로에 대해 가족 혹은 지인들의 상담을 받았습니다. 저는 나름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토로했지만. 처음 돌아온 대답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을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제게 다른데 한눈팔지 말고 전공에 신경 쓰라는 말이나. 일단 전공부터 우선적으로 하고 글은 나중에 여유가 될 때, 취미로 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게 공대생으로서 글을 쓰면서 맞이한 벽이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조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열심히만 하면 나름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되는 학과를 다니고 있으면서 되지도 않는 가능성만 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부분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시키는 대로 공부해서 적당히 성적 유지하고 전공 관련 외부 활동들 하다 나름 이름 있는 기업에 취업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게,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분야에 뛰어들어 수 없이 많은 이들과 경쟁해 승리하는 것보다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자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문학 전공자들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수상 소감을 남기자면 이번에 제게 과분한 상을 주신 건대신문 관계자분들과 심사위원이셨던 김홍신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캠퍼스에 이런 문화재 건물이 있는 것 알고 계셨나요? 공예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서울시 민속문화재 도정궁 경원당 사진·유동화 기자 조선 왕가의 잠저 ‘도정궁 경원당’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 9호인 ‘도정궁'은 조선 제 14대 왕인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저택이다.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의 집이었으므로, 선조가 임금이 되기 전 살았던 잠저인 셈이다. 잠저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을 말한다.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건물을 지난 1979년 우리대학으로 이전했다. 본래 도정궁은 부속 건물이 많고 면적도 굉장히 넓은 대저택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도정궁 속 ‘경원당'은 도정궁의 여러 부속 건물 중 하나다. 경원당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하전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1872년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건물이라 알려져 있다. 이하전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를 후보로 거론됐다 철종이 즉위하게 되자 안동 김씨 세도에게 희생된 인물이다. 도정궁은 안채와 사랑채가 ‘ㄱ'자 형태로 붙어 공간을 적절히 나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채가 만나는 지점에 부엌이 있고, 부엌이 있는 서쪽 편 안채에는 △안방 △대청마루 △건넛방이 있으며,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대청마루가 있다. 전통 한옥 양식이 바탕 이지만, 아치형의 출입문이나 이국적인 창틀 모양 등에서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도정궁은 새로운 장식과 기법을 사용해 조선후기 한옥 발전의 모습을 담은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로 넘어가던 시대의 한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문화재인 것이다. 독립운동 정신이 담긴 ‘구 서북학회 회관’ 청심대에서 가까운 곳에 붉은색 벽돌로 된 2층짜리 건물이 바로 등록문화재 제53호 ‘구 서북학회 회관’이다. 모금을 통해 1908년 완성됐다. 완공됐을 당시로선 보기 드문 벽돌로 된 현대식 건물이라 화제가 됐다. 유서깊은 상허기념박물관은 우리대학의 대표적인 상징건물이다. 사진·유동화 기자 독립운동 정신이 담긴 ‘구 서북학회 회관’ 서북학회는 1908년 안창호, 박은식, 유동열, 등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 출신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애국 계몽 단체다. 서북학회 회관은 일제강점기엔 보성전문학교, 협성실업학교건물로 쓰였다. 그 후 우리대학 설립자인 상허유석창 박사가 1941년에 매입했다. 유 박사는 광복 직후인 1945년 이 건물에 강습소인 ‘건국의숙’을 세웠다. 건국의숙은 1946년에 ‘조선정치학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대학의 전신이다. 그 후 1977년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이 건물은 도시 계획으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우리대학 서울 캠퍼스로 벽돌 한 장 한 장씩 옮겨와 1985년 복원돼 오늘에 이르렀다. 청심대에서 가까운 곳에 붉은색 벽돌로 된 2층짜리 건물이 바로 등록문화재 제53호 ‘구 서 북학회 회관’이다. 모금을 통해 1908년 완성됐다. 완공됐을 당시로선 보기 드문 벽돌로 된 현 대식 건물이라 화제가 됐다 이전 복원된 구 서북학회 회관은 현재 유 박사의 교육 이념을 기리는 박물관인 ‘상허기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지상 1층은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박사 기념 전시실로, 2층은 역사유물 전시실로 쓰이고 있다. 특히 2층에는 국보제 142호인 ‘동국정운’과 보물 제 477호인 ‘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가 전시돼 있다. 근대문화유산을 보전하며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의 하나가 됐다. 유동화 기자 donghwa42@konkuk.ac.kr 건대신문 [문화]치명적인 향기-20대 학우들이 애용하는 화학제품들, 뿌리고 바른 만큼 독성으로 돌아온다 우리대학에서 수업을 듣다보면 강의실 옆자리 그리고 가끔씩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안과 같이 반드시 타인과 밀착하게 되는 순간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다가 문뜩 느껴지는 강렬한 향기들. 대부분 향수이거나 여러 종류의 화장품 또는 방향제들이 내뿜는 존재감이다. 개강하면 학우들이 자주 마주치게 될 상황들 중 하나일 상황.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향기로써 긍정적인 자극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강렬한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피할 수 없는 향기들 속에서 무언가 숨어있다면? 향기뿐만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 화학제품 정확히 알아보고 사용해보자. 향기롭지만 치명적인 향기… 향수,섬유탈취제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는 향수. 로맨틱하고 감각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만 실은 그 기로움 속에 날카로움이 감춰져있다. 사실 향수는 합성된 석유화학물질이나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향수는 러 종류의 향료를 알코올 등 휘발성 물질에 용해시켜 희석시킨 제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향수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유서 깊은 화장품인 향수는 오로지 천연성분으로만 만들어지던 나름 안전한 화장품이었다. 하지만 1921년 ‘알데히드’라는 인조석유물질이 첨가된 최초의 인공성분 향수 ‘샤넬 No.5’가 등장하면서 향수는 더 이상 안전한 천연제품이 아니게 된다. 석유화학물질과 같은 인공화학제품들은 갈수록 발전하여 현대에 들어서 향수에는 프탈산염이라는 화학물질이 보편적으로 함유하게 된다. 문제는 그 프탈산염이라 불리는 ‘프탈레이트’가 환경호르몬 추정물질이라는 점이다. 만약 과다 흡입 시에는 각종 장기에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여성에게는 불임, 남성에게는 정자 파괴와 같은 생식 장애 또한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런 효과를 보니 향수는 말 그대로 인체에 유해한 것이다. 특히나 피부를 통하거나 코를 통한 직접적인 흡입으로 곧바로 호르몬을 관리하는 내분비계에 침투하니더욱 치명적이다. 그러다보니 향수를 뿌린다는 행위는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향해 독성물질을 내뿜고 있는 모습과 같다. “외모는 뭐다? 머리 빨이다?”…각종 헤어 제품과 염색약 생활 속에서 헤어 제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샴푸 또한 마찬가지다. 샴푸뿐만이 아니다. 린스, 에센스, 스프레이, 왁스 등등 모두 포함된다. 이러한 헤어 제품들 역시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제품들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큰 문제를 야기하는 부분은 바로 스타일링 제품군이다. 특히 머리 스타일과 고정을 위해 사용하는 헤어스프레이는 대표적인 위험 화학물이 사용된다. 오존층의 주 파괴 요인인 스프레이용 압축가스, 즉 프레온가스는 둘째 치고 ‘폴리비닐피롤리돈’ 이라는 발암물질과 ‘포름알데히드’ 그리고 앞서 말한 ‘프탈레이트’가 헤어스프레이 안에 섞여있기 때문이다. 이는 폐에 심각한 질환을 일으키거나 특히 두피와 같은 민감한 피부 또는 안구 등에 극심한 알레르기성 반응이나 장애 등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독성물질이다. 머리 좀 예쁘게 가꿀려다 암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첨가성분을 확인하고 기왕이면 스프레이 제품을 피해서 사용하자. 헤어 제품뿐만 아니라 우리대학을 돌아다니다 보면 형형색색 다양한 머리색을 한 학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염색 시 사용되는 염색 제품들 과연 안전할까? 보통 염색을 위해 모발 속 멜라닌을 산화시킬 때쓰이는 탈색제는 과산화수소와 암모니아로 이뤄져있는데 거기다 앞선 과정을 돕기 위해 과산화황산이 포함된 제품도 다수다. 이러한 산화 과정으로 인해 모발이 부식되고 손상, 특히나 각막에 손상을 줘 안구의 단백질이 녹아나 실명 위험이 있음은 대다수 학우들도 인지하고 있다. 또 하나의 피부, 또 하나의 가족…화장품 남자학우든 여자학우든 등교 전 제일 먼저 챙기는 물건 중 하나는 역시 스킨케어와 같은 화장품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몇 개의 화장품을 바르는지 또 얼마나 지우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학우들도 몇몇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우리 일상생활에 밀접한 화장품 또한 화학물질이 가진 위험성을 피해가긴 어렵긴 마찬가지다. 토너·크림·자외선 차단제·파운데이션·쿠션·마스카 라·아이라이너·섀도·매니큐어·립스틱 등 수많은 제품들이 우리의 몸속에 화학물질들을 침투시키고 있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토너나 크림과 같은 스킨케어 제품들을 살펴보자. 특히나 이런제품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화장품 기능상 성분침투가 원활이 이뤄지도록 여러 가지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여러 가지 유해물질들이 보다 손 쉽게 인체에 침투하게 된다. 특히 꾸준히 장기간 사용하게 되는 화장품의 특성 상 이러한 유해물질들은 계속해서 피부에 침착하고 피부 안팎으로 쌓여만 가게 된다. 화장품이 가진 기능의 효력이 좋을수록 건강을 더 효과적으로 해치는 효과를 초래한다. 게다가 화장품을 구성하는 다양한 화학물질들이 보다 잘 섞이게 유분기를 가지도록 만드는데 이로 인해 지방성분과 미생물이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때문에 미생물 증식이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산화방지제나 살균방부제등이 첨가된다. 실리칠산·페놀·크레졸·레놀신·헥사클로로벤과 같은 화학물질이 방부제가 가진 주요성분이며 대부분이 식품첨가물이나 아예 전반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약품들이다. 생활 속 숨은 복병… 데오X란트, 가X린, 위스X, 학용품 등 필수적인 생활용품들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사용 중인 땀 냄새 억제제나 구강 청결제품그리고 여성용품들 모두 생활 속에 쉽게 사용되고 있는 제품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제품들 역시 쉽게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작년에 뜨겁게 불거진 여성 생리대 사태로 인해대부분의 학우들이 좀 더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는 현황이긴 하지만 아직도 위험성을 모르는 채로 쉽게 사용 중인 제품들이 존재한다. 우선 체취를 제거하기 위해 많이들 사용하는 스프레이나 다양한 형태의 냄새 억제제품들이 있다. 냄새 억제제품들 안에는 주로 ‘알루미늄클로로하이드레이트’라 불리는 성분이 함유돼 땀구멍을 막고 몸속으로 알루미늄을 축적시켜 심각한 뇌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졌다. 바쁜 일정 속에 식사 후 이를 닦지 못할 경우 자주들 사용하는 구강 청결제품. 많이들 안심하고 사용하는 제품이기도 하다. 의외로 절대로 삼켜선 안 될 성분인 변성 알코올이 주요 성분이고 이는 절대 일반적인 음주용(?)알코올이 아니다. 게다가 향을 첨가하기 위해 쓰이는 ‘트리클로산’은 발암 물질이자 내분비계교란물질로 밝혀졌다. 여성 청결제 역시 실제로 더 나은위생을 위해 사용되는 제품이지만 양날의 칼을 지니고 있다.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 청결 작용을 하는 화학제품들은 인체에 해로운 균을 제거해주지만 피아를 구분하진 못한다. 질 내에 유익한 균들 역시 덩달아 제거하기에 자주 사용 시엔 면역력과 저항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전해진다. 주로 우리대학 학우들, 즉 20대들이 많이 사용할 제품들 위주로 알아봤지만 실은 더 수많은 제품들이 화학물질을 품은 채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제품들 모두를 사용하지 않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화학물질들이 가진 위험성을 인지하고 경계하여 보다 ‘덜’ 사용하는 습관이 주목받고 있다. 아는 만큼 건강해진다고 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이제부터 한 번쯤 물건을 사기전에 구성성분을 살펴보는 건 어떨까? 참고 서적 · 사이토 가쓰히로, 유해물질 의문 100,보누스(2016) · 허정림, 집이 우리를 죽인다,기린원(2009) 이준규 기자 ljk223@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왔다리 갔다리,서울다리이야기 서울 강북과 강남을 잇는 한강 다리는 총 몇개 일까? 서울 한강에는 총 26개의 다리가 있다. 이 26개의 한강 다리엔 하루에만 약 100만 대의 차가 오고 간다고 한다. 당연히 그 인파 속에는 습관처럼 버스와 지하철을 탄 채 강을 건너 등하교하는 우리대학 학우들도 포함된다. 이렇듯 한강다리는 우리 옆에서 쉬지 않고 강과 강을 건너 집과 일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매일같이 마주하는 한강다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동안 수없이 건너봤을 법한 여러 다리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건대신문>과 함께 다리와 우리 사이를 한번 이어보자. ① 화려한 외관과 조명 덕분인지 한강다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올림픽대교가 가진 또 다른 이름은 오륜대교이다. 올림픽대교는 대한민국 최초로 커다란 탑과 케이블을 이용해 지탱하는 사장교 방식으로 지어진 다리다. 중앙부에 놓인 주탑의 높이도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88m로 설계됐다고 한다. 지난 올림픽을 추억하기 위한 올림픽대교지만 때론 비극적인 다리로 기억된다. 2001년 5월 29일, 성화 모양 조형물을 탑 위에 설치하려던 헬기가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던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다리 조명에 숨겨진 주변 어두운 경관처럼 올림픽대교엔 즐거운 추억과 슬픈 기억이 함께 남겨져있다. ② 1936년에 태어나 94년도에 새 단장을 한 광진교는 광진구와 강동구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 광진교는 도로를 오고가는 자동차들이 아닌 걷는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한강다리다. ‘걷고 싶은 다리’로 선정되기도 한 광진교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화장실은 물론 음수대와 녹지대도 설치돼있다. 선선한 밤이 되면 지역주민들이 다리 위 전망대로 나들이를 오기도 한다. 우리대학 학우들도 매일 다니던 뚝섬유원지가 질린다면 한번쯤 편의점에서 캔 맥주 하나 사들고 나들이를 갈만할 장소다. ③ 마포대교는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에서 투신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다리다. 1970년에 건설된 마포대교는 예로부터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이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영화나 대중매체에서도 항상 테러나 사고의 중심지로 그려지곤 한다. 90년대 증권가 자살소동, 최근 남성연대 대표 투신사건까지 지금까지도 마포대교에선 수많은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이어준다’는 개념을 실현하는 다리가 역설적으로 목숨을 끊는 장소로 악명이 높은 것이다. 서울시에선 2012년부터 생명의 다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다리 위에선 “수영 잘해요?”, “밥은 먹었어?”, “생명!” 등의 자살방지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④ 반포대교 아래 자리 잡은 잠수교는 여름철 장마기간이 찾아오면 물에 잠기곤 한다. 그래서 보통 여름철 장마기간을 상징하는 다리 정도로만 인식된다. 하지만 잠수교는 군사 장비를 신속하게 옮길 특수한 목적으로 건설됐다. 잠수교가 물에 잠길 정도로 낮은 이유는 유사시에 빠르게 복구하여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서다. 반포대교 밑에 가려진 이유도 평상시에는 위성감시를 피하고 전시에는 폭격으로부터 차량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이처럼 잠수교는 서울을 전략적으로 지켜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이준규 기자 ljk223@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8 Next / 68 GO / 68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