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칼럼]선진국의 도시재생에서 성공의 노하우를 배우다 김세민(건축대·건축18) 우리나라는 낙후된 도시를 되살리기 위한 도시재생을 해왔고, 또 현재 많은 도시 재생 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 재생을 위한 정책들을 펼치고, 도시 재생 측면에서 철거 재개발과 같은 다양한 개발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는 등 현재 ‘도시 재생’이라는 것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시 재생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공업화로 인해 도시를 빠르게 개발해왔고, 정부는 주택보급률을 높이는 등 신도시 개발 중심의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중, 소도시 주변 지역에서의 개발로 인해 중, 소도시의 인구 유출률이 높아졌으며, 도시의 생산기반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시재생’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도시재생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는 활발하게 도시재생산업을 기획하고 또 실행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재생에 대한 한계점은 언제나 존재하였다. 나는 우리나라의 이러한 도시재생산업에 대한 한계점을 일본, 영국과 같은 선진국들의 도시재생 성공사례들을 보며 그들의 노하우와 패러다임을 본받는 것이 우리나라 도시재생산업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 영국에서의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예로 들자면, ‘킹스크로스’를 들 수 있다. 킹스크로스는 런던의 산업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이며, 산업 혁명 당시 유럽 교통의 중심지였으나, 영국의 산업이 쇠퇴하면서 재개발을 하게 되었다. 킹스크로스에 거주하는 시민과 재개발에 협조하는 사람들은 협치를 확보하여 런던의 여러 공공기관이 참여하는 협력기구를 구성할 수 있었으며, 네트워킹 공간인 ‘스킵가든’도 생기게 되었다. 이 공간은 농작물 재배, 시민 참여 워크샵 등 시민과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영국의 이러한 도시재생을 보면, 시민참여가 기반이 되고 있다. 시민과 교류하고 그들이 기반이 되는 도시재생을 함으로써 더욱 그 지역이 활성화되고, 이는 성공적인 도시재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선진국의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보며, 우리나라가 본받아야 할 부분들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일본은 복합 용도 개발을 실행하여 기존의 커뮤니티를 유지하며 동시에 이를 발전시켰고, 영국과 일본 모두 ‘시민’이 주체가 되어 시민과의 커뮤니티 공간을 만드는 등 시민들의 참여를 높이면서 도시재생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점들을 본받아 기존에 있던 제한적인 도시재생개발보다는 더욱 체계적이고 지역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하여 더욱 성공적인 도시재생을 이루어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경제 성장 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이다. 김세민(건축대·건축18)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새로운 인간관계를 마주하게 될 새내기들에게 하고 싶은 말 새 학기가 시작됐다. 1학기의 시작과 2학기의 시작을 굳이 구분하자면 1학기에는 좀 더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릴 새내기들에게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참 많다. 고등학교 때보다 좀 더 유기적인 선.후배 관계, 친구보다는 더 많이 쓰이는 ‘동기’라는 단어. 흔히 남중.남고, 여중.여고를 다녔다고 하는 친구들에게는 특히 새로운 관계들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인(人)’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본래 두 사람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 것처럼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문턱 직전 까지도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중요도의 유무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순간이던 정말 마음이 맞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좋은 ‘막역지우(莫逆之友)’일 수도 있다. 정말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날 때면 삶을 공유하기도하며 오래오래 공유하고 싶어지기도 하다. 그 사람이 특히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감정을 쏟으며 ‘내 살에 일부를 떼어 줄 수 있을 만큼’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고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결국 어느 순간 서운함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커져 마음에 ‘큰 응어리’로 변할 때도 있다. 그래서 혜민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자신이 불에 데일만큼까지 거리를 좁히지 말고, 그렇다고 관계 유지가 힘 들어질 때까지 거리를 두지 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위적인 감정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은 통제하는 순간 아프다. 자신이 데이지 않도록 통제하려는 그 순간조차도 우리는 괴롭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이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일까? 인간관계는 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이 때 내가 내 감정을 통제하지 말고, 상대방도 상대방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게 하자.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것을 통제한다는 것이 모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시행착오 과정에서 자신이 먼저 용기 내어 상대방과 소통하며 맞춰보자. 그러면 그 사람도 당신에게 맞출 것이다. 그러다 보면 통제하지 않아도 서로 적정선을 찾게 된다. 그것이 진짜 좋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관계는 항상 ‘조정 중’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조정의 끝이 아 름답다는 걸. 최의종 편집국장 chldmlwhd73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1인 미디어 가동민 편집국장 최근 ‘유튜브’,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개인 방송 시청이 늘어나면서 1인 미디어와 개인 방송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1인 미디어를 시청하고 있고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으로 크리에이터가 1위를 차지할 만큼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1인 미디어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이 활성화가 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대중화가 되면서 1인 미디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1인 미디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1인 미디어의 장점을 잘 살려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크리에이터 같은 경우 기존의 미디어들과 달리 양방향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어 시청자들이 직접 방송에 참여하는 느낌을 준다. 1인 미디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1인 미디어를 시청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나 임산부 등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할 때 먹방(먹는 방송)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출퇴근, 등하교 할 때 1인 미디어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꽤 많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크리에이터가 있는 만큼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요리, 여행, 공부 등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영상을 보며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다. 1인 미디어는 많은 장점과 함께 뚜렷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1인 미디어 특성상 촬영 장비만 있다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다. 그래서 의도를 갖고 가짜뉴스를 제작해 퍼트리기도 하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조회수와 추천수를 늘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자극적인 방송을 남녀노소 누구나 시청할 수 있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을 청소년을 비롯해 어린 아이들도 쉽게 접할 수 있어 문제가 된다. 저작권과 초상권 문제도 심각하다. 무심코 사용하는 음악이나 사진이 저작권 위반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요즘에는 길거리에 나가 방송을 진행하는 크리에이터들도 있다 보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얼굴이 생방송으로 송출돼 신상 정보가 노출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해당 크리에이터와 일반인이 마찰이 일어나는 일이 허다하다. 1인 미디어는 현재 우리 생활에서 크게 자리 잡고 있다. 1인 미디어가 새로운 문화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문제점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규제할 부분은 규제하고 활성화할 부분은 활성화시켜 올바른 미디어가 된다면 우리나라 전반적인 산업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가동민 편집국장 syg10015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새내기의 두 가지 고민 이승주 미디어부 기자 기나긴 수험생활을 끝내고, 대학교 캠퍼스에 들어온 지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났다.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입었던 교복 대신 어떤 옷을 입을까 고르고, 주는 대로 먹는 급식 대신 무엇을 먹을까 결정하는 사소한 일조차 어려웠다. 등교시간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을 타고, 넓은 캠퍼스에서 매번 다른 강의실을 찾아가는 일도 꽤 고역이었다. 남중과 남고를 졸업했기에 같은 강의실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입에 대본 적 없던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어색한 미팅 자리에도 나가봤다. 그렇게 모든 일에 어설펐던 신입생은 어느덧 캠퍼스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리고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중이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일은 석 달 동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든 돈으로 혼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여행을 떠난 것이다. 대학생 신분으로 많은 자유를 누리지만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고민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고민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야하는 과정인 군복무에 관해서다. 두 번째 고민은 진로와 직업에 관한 것이다.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하나’하는 걱정이 어느새 마음 속을 떠나지 않게 됐다. 군복무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닐 것이다. 반면 진로에 대한 문제는 누군가 옆에서 조언을 해주더라도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진로 방향을 결정할 때 가장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가치는 본인의 적성과 흥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교육은 학창시절에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저 좋은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며, 대학이름, 전공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배워왔다. 언제부터인가는 더 멋진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한다기보다 실패한 삶을 살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공부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최악의 청년 실업난 속에 있는 대학생들이 ‘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망설임 없이 택하고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정말 많기도 하다. 정말로 공무원이 적성에 맞아서 준비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안정적인 직업을 추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청년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먹고사는 현실에 쉽게 매몰돼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청년들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흔한 이야기지만 대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 학생회, 아르바이트, 여행 등 무엇이라도 좋으니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학년이 되어 마음에 존재하던 조금의 여유마저 사라지기 전, 비교적 자유로운 새내기 때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나에게 소중하고 즐거운 ‘무언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승주 기자 sj98lee@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새내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 전종현 예술디자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강사 나는 지금 ‘생각하기/이해하기’라는 1학년 수업을 진행 중이다. 올해 학사 커리큘럼이 개편되며 새로 생긴 과목인지라, 스타트를 끊는 입장에서 나름의 수업 목표를 설정해봤다. ‘디자인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인문 지식을 습득한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 필드에 실제 출현한 디자인 작업의 생애를 정리한다. 궁극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공포심을 해소한다.‘ 말이야 쉽지! 조형 능력을 갈고닦기에도 시간이 늘 부족한 신입생이 잠시라도 언어로 사고하는 기회를 갖고, 글을 매개로 감각과 의견을 명징하게 전개하는 시도를 통해, 훗날 다양한 사람들과 원활히 소통하는 기반을 다질 수 있길 소박하게 소망 중이다. 얼마 전 디자인 다큐멘터리 3부작을 보여주고 감상문 세 편으로 중간고사를 대체했다. 오타나 비문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다큐멘터리 내용을 충실히 요약하고 자신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밝히라 종용하며 감상문을 받았다. 186편을 채점한 후 전체적인 결과를 분석해보니 흥미로운 흐름이 포착됐다. 경험이 많아 유리할 거라 생각했던 고학년보다 갓 들어온 신입생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이다. 원인은 바로 솔직함이었다. 1학년은 의식의 흐름을 적거나, 편지처럼 의견을 말하고,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는 등 형식은 중구난방이었지만 내용 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감정, 경험, 생각,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주 명확하고 정직하게 내뱉는 반응은 무척 신선했다. 정형화된 감상문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고학년은 형식 면에서 정갈하고 유려했지만 생기가 없는 글이 자주 보였다. 신입생과 1년 차이인 18학번에서도. 심지어 다큐멘터리 자막을 모아 기술적으로 재배열한 경우까지 있었다. 어쩌면 나는 한국 고등교육의 큰 비밀을 엿본 것일까.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들어와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동화되는 데 1년이면 차고 넘친다는 사실 말이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학점을 체크하며, 어느새 ‘눈치’와 ‘노하우’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개성 넘치는 주관과 목소리는 얼마나 쉽고 허무하게 사그라드는가. 자유롭기로 학교 대표 격인 디자인학과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면, 과연 다른 단과대학은 어느 상황일지 감히 생각하기도 두렵다. 사람들은 요즘 대학생이 너무도 자유분방하다 흉보지만, 어쩌면 진실로 자유로운 순간은 입학 이후 단 몇 개월일지도 모른다. 솔직함이 샘솟는 곳에 미리 우물을 파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땅은 굳어 단단해지고 훗날 순수한 주관을 퍼올리기란 영영 힘들어진다. 지식과 지혜, 스킬과 노하우 모두 좋지만, 새내기에게 정말 필요한 건 거칠고 서툴지라도 비정형적 사고의 틀을 자유롭게 유지하는 것 아닐까.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유의 방’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구성원의 독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전종현 예술디자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강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상상력을 키워봅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논의가 아주 뜨겁다. 미래산업의 성장동력이기도 한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을 노동의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물질적인 풍요함을 더 다양하게 누릴 수 있게 한다. 지금도 3D 프린터를 사용하면, 피규어, 신발, 가구를 넘어서 집과 각종 건축물을 직접 구현할 수 있게도 되었다. 즉, 발달된 기술이 인간에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어떻게 만드는가’보다 ‘무엇을 만드는가’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런 현 상황은 무엇보다도 창의성을 더욱 필요로 하며, 그런 창의성을 도출해내는 원천으로서 상상력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막연한 환상(幻想)이나 공상(空想)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상상력은 ‘근거 또는 체계를 지니는 상상력’이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창의성이란 단지 사물을 연결하는 것(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 이라고 하였다. 즉 창의는 기존의 것들을 재조합함에서 시작하는 뜻이다. 하지만, 이때 상상력은 폭넓고 깊은 독서와 다양한 문화체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중국에는 ‘행천리로, 독만권서(行千里路, 讀萬卷書)’ 란 말이 있다. 즉 깨달음을 얻으려면 천 리의 먼 길을 다녀보고 만 권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우리에게 지식을 전파해주는 스승이자 친구다. 특히 한국과 문화권을 공유해온 중국의 전통적인 신화·민담·설화 등 다양한 문화자원이 담긴 책들은 우리의 인문적 사고를 높이는 보고(寶庫)이다. 또 한 가지, 책을 읽는 것만큼 중요하는 것은 경험이다. 현지 탐방을 하며 다양한 체험을 얻고, 방송·영화·공연·축제 등 문화콘텐츠를 통해 풍부한 오감(五感)의 느낌을 쌓는 것도 좋다. 이런 다양한 독서와 경험은 풍부한 상상력의 바탕이 될 것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박원호 교수는 <대학의 죽음>이란 글에서 “대학은 근본적으로 꿈을 꾸고, 꿈을 기르는 곳이며 바로 그 꿈에 우리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러나 지금 대학은 입시기관, 기업의 인력양성소로 전락했다.”고 대학의 현실을 비판한다. 사실 우리는 당장 4년간의 커리큘럼에 매달려 있고 졸업 후 사회 진출에 대한 부담도 아주 크다. 사회진입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대학도 필요한 역할이지만, 대학 4년간만큼 평등한 관계 속에서 눈치를 보지 않으며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시공간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 역시 여러분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체험을 공유하며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워가는 선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이동배(문화콘텐츠학과 KU교육전담교수) lidongbei@naver.com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사라져가는 빛 -인문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지은 대학2부장 강의를 듣고 난 후 “현대 사회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가치가 상실되고 있어 안타깝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교수님 말씀 그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인문학 분야를 추구하기보다 이공계열 분야를 더 중시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가는 인문학 계열의 학과를 축소하거나 취업률이 높은 실용학문을 위주로 학과를 재편하는 추세이다. 기성 언론 전문가들이 발표한 바로는 이러한 현상은 취업 문제 때문에 인문계열 학과에 재학하려 하는 학생들이 감소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한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에 제시된 취업률 통계만 보더라도 학생들이 인문계열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공학계열은 취업률이 70%에 달하지만, 인문계열은 56%만이 취업해 인문계열은 절반이 취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지속해서 접하다 보면 사회 속에서 인문학의 비중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인문학적 소양의 가치 또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3차 산업혁명 초기 당시에는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인문학적 소양에 관한 관심이 급증하고 ‘인문학 열풍’이 불었는데 어느새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니 인문학적 소양의 가치는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올수록 인문학 및 인문학적 소양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경쟁력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인문학적 소양은 우리를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새로운 발상의 계기를 제공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창의력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사람들의 획일화된 발상으로는 무한경쟁시대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에 대비해 우리에게 다양한 발상을 하게끔 하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정부와 기업 그리고 현대인들은 현실에 치여 인문학적 소양의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현재 우리는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 4차 산업혁명을 단순히 공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인문학을 기반으로 바라봄으로써 진정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지은 대학2부장 emily909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비핵화, 저 멀리 험한 령을 넘어 김지용 (사과대·정외15) 학우 북핵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김일성은 1945년 일본 제국을 좌절시킨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실감하고 6.25전쟁 중에는 만주에 핵투하를 고려한다는 맥아더의 위협적인 주장을 몸소 체험한다. 전쟁 이후에는 소련에 핵 물리학도들을 파견하고 원자로를 수입하는 등 핵개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아울러 국제정세 역시 급변하고 있었다. 1956년 제 20차 공산당대회에서는 스탈린격하운동이 일어난다. 1959년에는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이 철수하고 얼마 뒤 1962년 쿠바 위기 당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소련을 두고 중소분쟁이 격화된다. 대국들의 분열을 바라보며 북한은 더 이상 냉전의 진영논리로만은 자국의 안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고 4대 군사노선 등을 통하여 자주국방을 도모했으니 그 수단으로 핵보유가 추진되었음은 자명하다. 1993년 북한의 NPT 탈퇴와 1994년 서울불바다 발언 등으로 촉발된 제 1차 핵 위기 사태는 영변 핵시설 폭격,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비화될 뻔 했으나 미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극적인 방북으로 봉합된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선군사상’을 내세우며 이전보다 더 과감한 방법으로 핵개발에 몰두한다. 김정일 시대에 나름대로의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낸 북한은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지난 2017년 말 드디어 ‘핵 무력 완성’을 공표한다. 지금 북한은 선(先) 종전선언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먼저 받은 다음의 비핵화 절차가 사리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라 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애초에 북한은 미국의 상대가 되질 못한다. 북한은 체제보장을, 미국은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거래를 원할 뿐이다. 선언은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말 그대로 ‘선언’이기에 정치, 수사적임에 불구하며 구속력이 떨어진다. 가령 미국이 종전선언을 먼저 수락한 상태에서 소위 북한이 ‘호박씨 까는 행동’을 보이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좀 더 대국다운 태도를 보이라며 미국을 탓한다. 그러나 비판의 화살을 미국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 역시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신뢰받지 못할 전력들을 쌓아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조급하다. 올해 11월에 중간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세울 성과가 필요하다. 분위기가 한창 좋았을 때는 노벨 평화상 이야기까지 오르내렸으니 지금이야 오죽할까. 최근 북한의 행보 역시 지난 세월에선 찾아 볼 수 없었던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상대방의 선의만을 믿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상술했다시피 핵이란 그들의 입장에서는 세대를 이어온 가업이자, 조국의 명운을 걸고 피눈물을 다 바쳐온 숙원사업, 그리고 그들을 자위하는 최후의 보루이기에 쉽게 내려놓을것이라는 과도한 낙관적 전망은 곤란하다. 김지용 (사과대·정외15)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붉은 해일-여성혁명의 시작 혜화동 붉은 해일이 여성들에 의해 일어났다. 이것은 불법촬영 편파수사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자 분노의 정치학이 과연 무엇인가를 1만 2천여 명의 여성들이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붉은 물결인가? 불법도촬 피해영상물의 유포로 인해 자살해야만했던 여성들, 사회적 고립과 공포감에 숨어야만 했던 여성들, 나도 찍혔을 것이란 불안피해에 노출된 여성들, 바로 그녀들이 흘린 피에 대한 기억이자 애도행위이며 나아가 이것은 여성 포식적 남성연대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레드 카드이다.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자 98.4퍼센트가 여성이지만 여성들이 찍히는 자가 될 때엔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 사회는 묵인, 방관해왔다. 즉 "무엇을 했느냐?"가 아닌 "누가 했는가?"에 따라 명백한 범죄인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및 수사기관의 대응방식의 속도 차이가 존재함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남성이 찍는 자일 때에 이 사회의 정의론은 작동하지 않지만 여성이 감히 찍는 자가 되었을 때는 온 사회가 들썩이며 이 세계의 정의론을 발동시킨다. 왜냐하면 여성이 찍는 자가 되었을 때는, 기존의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욕망하는 자와 욕망 투사물의 이분법이 뒤흔들려 남성권력구조를 위협하는 반체제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남성들의 불법도촬은 젊은 날의 치기어린 행동이나 공격적 성본능의 일환으로 용인되지만 여성의 불법도촬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반도덕적 행위로 간주되는 이 사회의 불공정한 수용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사회의 주류인 남성들에게는 용인과 방관의 폭이 매우 크기에 그들의 폭력은 장난이나 실수 정도로 하향 조정되어 수용되지만 이 사회의 소수자인 여성들에게는 한 치의 실수나 헛발질조차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녀들의 행위는 항시 상향 조정되어 사회적 위협대상으로 힐난과 공격의 포화를 집중적으로 받음으로써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할 대상으로 규정되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법도촬을 한 여성 가해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이변적 사회처단의 시그널을 쏘아올린 것은 여성은 언제나 찍히는 자라는 것, 응시의 대상이라는 자리에서 그저 가만히 있을 것을 강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정한 정의론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여성들은 붉은 시위라는 혁명의 초침을 앞당겼다. 더 이상 남성공포 아래 체념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지 않겠음에 대한 선언이자 변화를 위한 전면전의 실행이다. 또한 이는 부조리한 세계를 박살내기 위한 불가능성의 조건들과의 쟁투이다. 왜냐하면 혁명은 가장 절박한 비명으로부터 시작되며 불가능해 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튀어 오르는 섬광 자체이기 때문이다. 윤김지영 교수(몸문화연구소)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보수 대 진보의 맹점 무릇 언론의 존재 이유는 미국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나 유럽의 공론장 이론이 제시하듯이 민주주의에 있다. 인터넷 혁명이 열어놓은 ‘미디어 빅뱅’을 우리가 주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이 언론활동을 하는 시대라거나 ‘우리가 곧 미디어’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할 만큼 미디어 지형은 급변하고 있다. 그에 따라 거의 모든 사람이 미디어를 비평한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언론에 대한 네티즌의 감시도 일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언론을 바라보는 비평의 준거가 흔들리고 더 나아가 정파성이 강화되어 가는 것은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흔히 조선‧중앙‧동아일보와 한겨레‧경향신문을 정파의 두 진영이나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으로 나눈다. 심지어 그 연장선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은 ‘진보정부’이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보수정부’로 구분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언론과 정부에 대한 그런 인식은 학문적이지도 못하고 진실과도 거리가 멀다. ‘편 가르기’식 표층적 구분이 넘치는 네티즌들의 미디어비평을 견인해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언론학에 있음에도 더러는 그런 논리를 고집하는 연구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언론을 ‘보수/진보’의 정파로 나누어 규정할 때, 무엇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실종된다. 어떤 언론이 저널리즘의 본분에 충실한가를 따져야 할 상황에서 정파의 틀은 정작 문제의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언론 보도에 대해 옳고 그름을 규명하지 않고 ‘정파성’의 잣대로 들이대는 주장은 언론현실과 민주주의 실상을 오도할 위험성이 충분하다. 보수든 진보든 언론이라면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인 진실과 공정에 근거해야 마땅하다. 언론을 평가하고 견인해가야 할 기준도 마찬가지다. 진실과 공정이다. 일찍이 월터 리프만이 강조했듯이 진실의 기능은 숨어있는 사실을 규명하는 것, 그 사실들의 연관성을 드러내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그게 근거해서 행동할 수 있는 현실의 상을 보여주는 데 있다. 또 다른 핵심가치인 공정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야 하고 사회적 약자 대변을 미덕으로 한다. 흔히 ‘보수적 언론단체’로 꼽히는 관훈클럽조차 ‘한국언론의 좌표: 2000년 위원회 보고서’에서 “한국 언론은 중산층을 주된 소비자로 상정하고 있는 한편 언론인 자신들도 중산층에 편입되어 있어 주로 중산층의 의견을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옹호”한다면서 “그 결과 자연스럽게 소수 계층의 의견과 이익은 구조적으로 배제”된다고 비판했다. 그래서다. 조선‧중앙‧동아일보와 한겨레‧경향신문을 두고 어느 한쪽은 무조건 잘못이고 어느 한쪽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정파적 접근은 적어도 대학인이라면 넘어서야 한다. 언론의 고유 가치인 진실과 공정의 잣대로 언론과 여론을 섬세히 살피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일, 저널리즘 이해의 고갱이다. 손석춘 교수 (문과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83 Next / 83 GO / 83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