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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미희 전 국회의원, “건대 항쟁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김미희(서울대ㆍ84학번) 전 국회의원은 1986년 당시 약학대 학생회장 신분으로 건대 항쟁 참여했다. 건대 항쟁을 전환점으로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정치계에 입문했다는 그녀는 19대 국회의원까지 당선됐지만,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며 의원직이 박탈됐다. 그렇게 그녀의 ‘진보 정치’의 길은 끝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만난 김 전 의원의 모습은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며 웃음 짓는 그녀에게 ‘건대 항쟁’은 어떤 자양분이 되었을까?
김미희 전 국회의원 (사진ㆍ정두용 기자) |
Q. 건대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시게 됐나요?
저는 당시 서울대 약학대학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과제는 부당한 군부정권을 마감하고,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현실적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는 대학생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과제였고, 우리의 미래와도 직접 연관돼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학투련의 결성식이 건국대학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은 크게 *<자민투>와 <민민투>로 나뉘었는데, 이렇게 양분된 학생운동을 반성하고, 애학투련으로 모아내며 실천방향을 정하는 결성식이었습니다. 또한 반외세, 반독재, 평화통일의 구호는 시대의 과제이며 꼭 필요한 목소리였죠. 저는 이런 애학투련의 의의와 구호에 동의했고, 뜻있는 약학대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Q. 건대 항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결성식이 끝나고, 집에 가려던 찰나에 전경들에게 포위됐습니다. 우리는 잡히지 않으려고 본관(현, 행정관)으로 들어갔죠. 우리는 전경들에게 “우리는 평화시위를 진행했다.”고 말하며 ‘안전귀가’의 보장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농성은 3박 4일 동안 진행됐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농성에 본관의 학생들은 굶주림에 지쳐갔습니다. 전경의 포위를 뚫고 음식을 구해오는건 당연히 불가능했죠. 매점은 사회과학관(현, 경영대)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과정으로 가능했는지 세세히 기억할 수 없지만, 희망의 끈이 연결됐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밧줄을 연결한 것이죠. 학생들은 밧줄이 연결되자,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밧줄을 타고 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전달된 돈은 사회과학관 매점에 놓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음식이지만 많은 학생들이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20명 남짓의 학생들과 함께 어느 교수연구실에 있었는데, 그때 우리 방으로 온 음식은 초코파이 다섯 개와 수프 두 그릇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서로 양보했고, 누가 더 먹겠다고 싸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양의 음식이지만, 기분 좋게 옆 학생과 나눴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Q. 건대 항쟁에 참여한 경험이 이후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농성이 특수부대의 진압으로 끝나며, 많은 학우들과 함께 구속되면서 저 역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학생회장으로서, 선배로서 후배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지 못한 죄책감과 무력감을 경험했죠.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건대 항쟁을 통해 제 삶의 지향점을찾을 수 있었습니다. 애학투련 결성식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건대 항쟁 이후, 저는 집행유예를 받기 전까지 100일 가량을 서울구치소에서 지냈습니다. 학교는 집행유예를 받은 학생들에게 ‘무기정학’을 일괄 통보했죠. 87년 2월 석방되어 7월 복학 통보를 받기 전까지 많이 힘든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해답을 80년 광주항쟁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기정학 기간 고향인 목포에 있었는데, 처음엔 막막하더군요. 그러던 중 5월, 친구에게서 자기네 학보에 실을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주제는 광주항쟁이었죠. 그 글을 위해 광주항쟁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며 많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희망을 찾았죠. 80년 광주는 무정부상태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양심이 살아있던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초코파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저희처럼 말이죠. 광주항쟁이 실패가 아니듯이, 건대 항쟁의 의미도 뚜렷합니다. 또한, 광주항쟁을 공부하며 많은 시민들이 저와 같은 생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음이 증명됐죠. 건대 항쟁은 제 삶의 방향을 굳히는 큰 계기였고 전환점이었습니다.
Q. 사회는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신가요?
네! 물론입니다. 제가 정치의 길을 걸으며, 암담한 현실에 직면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대 항쟁의 좌절이 6월 민주항쟁을 촉구했던 것처럼,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던, 소수정당으로 지역구 의원 당선돼서 올바른 이야기를 국회에 전달할 수 있던 기회를 성남시민들께서 주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또, 최근엔 20대 국회를 ‘여소야대’로 국민들이 만드셨을 때도 전 희망을 봤습니다.
86년 10월의 건국대 서울캠퍼스는 그런 희망이 넘치는 공간이었습니다. 건대신문을 읽고 계시는 건국대 학생여러분은 뜻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공부한다는 자부심을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자신의 개성과 적성에 따라 직업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 우리나라에서 같은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해결할 과제가 무엇이고, 그 과제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도 고민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 같네요.
*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화 투쟁위원회(민민투)와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는 85년의 전학련 산하 삼민투위에서 학생운동권의 투쟁세력간의 노선 차이로 양분된 것으로서, 이후 여러 차례 개편과 이합집산을 거쳤다.
* 이 기사는 3번째 연재기사로, 10.28 건대항쟁 30주년을 기념하고자 기획됐습니다.
정두용 기자 jdy2230@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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