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수 상허교양대학 교수 ‘나’라는 자의식이 생기면, 누구나 삶의 본질에 대해서 묻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둘러싼 자연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은 왜 같이 모여 사는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고, 한 번의 삶을 허황되게 살고 싶지 않은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물론, 이런 질문을 ‘나’만 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인류의 선배들이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답을 찾은 사람도 있고, 찾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선배들이 찾은 답 중에, 어떤 답은 무엇이 궁극적인 진리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답은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답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배들의 답에 마음을 실을 수 없게 되면,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더 이상의 생각을 포기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질문을 계속하거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끝없는 질문 속에서 헤매느니, 현재의 삶에 충실하겠다고 물러서거나, 어떤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포기가 ‘자기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겠다는 것은 현재의 ’어떤‘ 가치관에 충실하겠다는 것이고,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어떤‘ 계파의 생각에 귀의한다는 것일 뿐이다. 내가 스스로의 생각을 그치는 순간 나는 ’나의 삶‘이 아니라, ’어떤‘ 누구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나의 삶은 궁극적으로 ’내‘가 찾아갈 수밖에 없다. 끝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고, 각자의 대답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딜레마 속에서도, 질문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우주가 한번 뿜은 증기이면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우주보다 더 고귀하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 것도 모른다. 우리의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파스칼, 팡세, 391). 우리 헌법은 이런 솔직한 인간들을 품고 있다. 진리를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질문할 수 있으니 각자가 ’나‘일수 있고, 각자가 존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질문하고 있는 내가 소중하니,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도 소중하고, 모두 각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헌법 제10조). 잘 모르고, 불완전하고, 부족하다고 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으니 아름다운 것이다. 황도수 상허교양대학 교수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