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건대신문 [만평] 2019.03.16 20:35 건대신문 조회 수 : 1251 추천 수 : 0 댓글 수 : 1 박제정 기자 j213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추천 비추천 목록 신고 댓글1 Jobs 19.04.03 10:14 신고 잘 읽었습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여행]겨울이 싫다면 따뜻한 ‘아랍에미리트’로 UAE(아랍에미리트)가 중동에 위치하고 있어 습하고 덥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UAE의 겨울은 평균 14도에서 27도 정도를 웃돈다. 낮에는 우리나라의 초여름 날씨와 비슷하고 밤에는 선선해 초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겨울 시즌에 관광객이 급증한다. 최근에는 두바이와 아부다비가 신혼여행지로 뜨고 있다고 한다. 지난 1월 ‘AFC 2019 아시안컵’이 개최되기도 했고 ‘2020 두바이 엑스포’를 준비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UAE는 두바이, 아부다비 등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이다. 수도인 아부다비의 왕이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시티 구단주로 유명한 만수르(UAE 부 국무총리)가 아부다비의 왕자이다. 중동 국가에서 사막은 필수 여행 코스다. 지프차나 SUV 차를 타고 사막의 모래 산을 넘나들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지나가다 보면 기름을 추출하는 것도 보인다. 한국에서 보던 모래사장과 달리 사막의 모래는 정말 부드럽다. 맨발로 사막을 걸으면 발이 모래 안으로 들어가면서 따스한 햇살과 달리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주황빛 사막에 노을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자연이 만들어 낸 오묘한 빛깔의 노을은 대자연의 위엄을 보여준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서서히 달과 별이 선명해진다. 사막에 누워 밤하늘을 보면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만 같다. 밤이 되면 낮과 달리 쌀쌀해지기 때문에 바람막이와 같은 겉옷을 챙겨가는 것이 좋다. 두바이 몰 앞에 있는 부르즈 칼리파 두바이는 129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그 중 당연 눈에 띄는 것은 부르즈 칼리파일 것이다. 부르즈 칼리파는 162층, 828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칼리파는 아부다비 왕의 이름이다. 주변에는 두바이 몰과 인공호수가 위치하고 있다. 두바이 몰은 세계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1,200여 개의 상점이 있고 내부에는 아쿠아리움과 영화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200여 개의 상점이 있는 만큼 국내에 없는 브랜드 매장과 제품도 있어 관광객 필수 쇼핑 장소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호텔 분수 쇼, 스페인 카탈루냐 미술관 몬주익 분수 쇼와 함께 세계 3대 분수 쇼로 손꼽히는 두바이 몰 분수 쇼가 부르즈 칼리파 앞에 위치한 인공호수에서 진행된다. 분수 쇼 전에 LED 쇼를 먼저 진행된다. 꼭대기가 보지 않을 만큼 높은 건물이 색이 바뀌고 레이저를 쏘는 모습은 단연 압권이다. 분수 쇼의 물줄기는 150m 위까지 올라가고 음악에 맞춰 약 5분 정도 진행된다. 음악은 매 쇼마다 다르게 선곡된다. 세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 종교 사원을 가면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아부다비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스크가 있다. 두바이에서 차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사원의 이름은 세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로 사원 모든 외벽이 흰색 대리석으로 돼 있어 화이트 모스크라고도 불린다. 세이크 자이드는 UAE 초대 대통령 이름이다. 세이크 자이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모스크 안에는 기도 카펫이 있는데 1,300여명의 장인들이 모여 2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이 카펫은 시계에서 가장 큰 카펫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랜드 모스크를 돌다 보면 이름답게 웅장함이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하얀색의 외벽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자세하게 볼수록 아름다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기둥마다 화려한 꽃무늬가 있고 천장에는 비슷한 패턴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천장에 달려 있는 두 가지의 샹들리에는 산유국다운 부유함을 보여준다. 먼저 볼 수 있는 밝은 샹들리에는 우아함을 뽐낸다. 돔의 정중앙에 형형색색의 수백만 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이뤄진 샹들리에는 보는 이들을 매료시킨다. 그랜드 모스크에는 복장 규제가 있다. 관습에 따라 여자는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야 하고 살이 노출되는 복장은 천으로 가려야 된다. 손목과 발목이 보여서도 안 된다. 남자는 간단하게 반바지를 제외한 모든 복장을 착용할 수 있다. 두바이 도심을 다니다 보면 많은 건물에 ‘EMAAR’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두바이 최고의 건축 회사이자 부동산 회사이다. UAE에서 자동차의 번호판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두바이의 번호판은 하얀색 배경으로 번호판 자릿수가 신분을 나타낸다. 한 자릿수는 왕족, 두 자릿수는 왕족의 가족, 세 자릿수는 왕족의 친척, 네 자릿수는 현지인, 다섯 자릿수는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두바이 왕의 번호판은 1번이고 왕세자의 번호판은 11번이라고 한다. 아부다비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 아부다비의 번호판은 노란색 배경이고 두바이와 비슷하게 자릿수가 적을수록 왕족이나 부유층에 가깝다. 아무래도 해외여행의 가장 큰 묘미는 현지식이다. 하지만 UAE는 현지인의 비율이 10% 남짓이기 때문에 현지식을 찾기 어렵다. 대신 레바논, 바레인과 같은 중동 국가의 음식을 비롯해 북한의 옥류관에서 현지 평양냉면을 즐길 수 있다. 글·사진 가동민 기자 syg10015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사설]학생 장학제도 좀 더 신중한 운영 필요 최근 새 학기가 시작되고 국가장학금 신청 기간이 지나면서 장학금에 대한 학우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대학을 다니다 보면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학우들이 장학금에 관심을 갖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한다. 우리 대학의 등록금은 3,316,000원에서 5,090,000원까지 다양하게 분포돼 있고 평균 약 400만 원 정도이다. 400만 원이 적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학우들은 장학제도를 통해서 등록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 한다. 예전에 비해 대학 장학제도가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는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거나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례를 자주 접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비교적 줄어들었다. 국가장학금 등 여러 장학금이 생겨나면서 대학생들의 걱정거리를 조금이나마 덜어줬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의 경우에도 다양한 교내 장학금이 있으며 2018학년도 2학기에 장학 예산이 여유가 있어 소득분위 0~7분위까지 등록금 잔액을 학교에서 지원해줬다. 하지만 장학제도 운영에 있어 여러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작년에 장학금과 관련한 여러 가지 논란들이 있었다. 2018학년도 1학기 성적우수장학 중 ‘의조’ 장학금이 등록금의 50%에서 40%로 감소한 것이다. 장학복지팀에서는 ‘의조’ 장학금의 기존 비율인 40%에서 50%로 인상해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각 단과대별, 학년별 인원 선별과정에서 행정오류로 인해 계획된 예산보다 증가하면서 ‘의조’ 장학금을 40%로 다시 감소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12월 PRIME 장학과 성적장학금, 건국사랑장학금의 이중수혜가 불가하다는 공지가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PRIME 장학은 KU융합과학기술원 8개 학과의 신입생들에게 주어지는 장학이다. 직전 학기에 15학점 이상을 이수하고 평점이 3.6 이상을 유지하면 수시전형 최초합격자는 최대 1년, 정시전형 최초합격자는 최대 2년 동안 등록금의 50%를 받을 수 있다. 학교 측은 PRIME 장학에 대해 “PRIME 사업이 종료되면서 PRIME 예산이 없어졌고 PRIME 장학을 유지하기 위해 장학 예산을 편성하는 대신 이중 수혜를 불가하도록 변경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올해 2월 장학복지팀은 “PRIME 장학 이중 수혜 제외 대상을 신입생 19학번으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더불어 학교 측의 성적입력 실수로 많은 학우들이 학자금 대출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확대된 장학 제도에도 불구하고 등록금의 부담을 덜어내지 못하는 학우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학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 측은 등록금과 장학금으로 인해 일희일비하는 학우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장학제도 운영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사설]숙제를 충실히 하는 삶 여기저기서 꽃들이 다투어 핀다. 겨울 내내 황량했던 나무와 공기와 건물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면서 한 해를 시작하려 한다. 교정엔 안 그래도 개강이 되어 넘쳐나는 인파인데 신입생들의 신기한 호기심들이 겹쳐 새로운 기운이 펼쳐지고 있다. 그렇지만 한 해의 문을 여는 지금 그렇게 너무 들떠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된다. 꽃과 나무와 새 울음 속에서도 내가 잡아야 할 나의 중심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숙제를 충실히 하는 삶을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곧 과제물을 잘 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나 하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과제물을 충실히 준비해야 하는 것도 대학생활의 필수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숙제란 비단 과목을 이수하기 위한 과제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내 삶의 청사진에 맞는 과제들을 의미한다. 예컨대 축산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신이 장차 축산 분야의 어떤 구체적인 활동과 직업을 택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여 하나의 타임 스케줄을 작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스케줄에 따라 자신이 꼭 해야만 할 일이 그 학생에게 있어서는 그 자신만의 피할 수 없는 숙제라 할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인문학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비전을 구체화하고 그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할 리스트를 작성, 실천하는 일이 바로 그만의 숙제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전공이나 직업과 관련된 숙제, 타인의 과제와 대체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숙제가 있게 마련이다. 그 숙제를 방기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돌아다니게 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손 치더라도 결국엔 남의 숙제를 내 숙제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 삶의 청사진을 그린다 할 때 그 청사진에는 반드시 이런 전공이나 직업과 관련된 것만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녹아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는 세계의 실상이 어떠한가, 어떤 모순이 있고 어떤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또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 등등 삶 전체와 관련한 수많은 질문들이 가득 차 있다. 앞서 말한 전공이나 직업과 관련한 숙제도 이러한 세계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과 관련되지 않으면 방향을 상실할 가능성이 많다. 꽃피는 3월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아름다운 시절이다. 꽃들이 피듯이 마음도 피어올라 캠퍼스는 멋진 향기들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이 아름다움도 곧 가겠지만 우리는 그 이후에도 나만의 멋진 향기를 계속 뿜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자신만의 숙제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악기를 다룬다는 것 정명수 (이과대·물리18)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쳐 왔다. 처음에는 조그만 손에 비해 큰 건반을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다른 소리가 난다는 게 놀라웠다. 누른 음들 하나하나가 모여 예쁜 선율을 만드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아노는 내게 특기나 취미가 아닌 의무가 되었다. 워낙 재능이 없다 보니 한 곡을 완벽하게 치기 위해선 지루한 연습을 한참 동안 해야 했고, 이런 나날이 반복되면서 피아노에 대한 흥미는 갈수록 메말라갔다. 매주 한 번씩 있는 레슨을 위해 한 시간도 연습하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어머니는 결국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 피아노 레슨을 끊어버렸다. 처음 몇 주 동안은 더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신났다. 하지만 점차 헛헛한 감정이 내 마음을 채웠다. 생각보다 나는 피아노란 악기에 내 마음의 많은 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다시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할 양은 점점 많아 졌지만, 피아노를 놓지 않았다. 피아노가 내게 쉼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대학과 미래에 대해 분주했던 내 모습, 답답했던 감정을 조금이나마 내려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대학에 올 때까지 꾸준히 피아노를 쳤다. 꿈에 그리던 대학에서의 새 학기, 어느 동아리를 들어갈까 살피던 중 피아노 동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은 어떨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동아리에 들어갔다. 정말 많은 사람이 피아노를 좋아하고, 피아노를 매개로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덴 경탄할 만큼 피아노에 자신의 ‘혼’을 쏟으면서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완전히 따라잡을 순 없겠지만, 나도 그들처럼 내 감정을 더 멋지게 표현해보고 싶었다. 자연스레 연습량이 늘었다. 일 년이 끝날 즈음이 되니 아직 부족하지만 예전보다 능숙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학업, 대인 관계 등 여러 문제로 지칠 때마다 나를 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어줬음은 물론이다. 음악이 없는 삶과 있는 삶은 다르다. 음악을 듣기만 하는 삶과 만들어내는 삶은 또 다르다. 수많은 연습과 노력을 통해 나만의 감성을 가지고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희열은 한 번 느끼면 끊기 어렵다. 또한 악기는 사람을 부드럽게 하고 삶에 여유를 가져다준다. 지금 내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학점과 스펙을 쌓을 걱정에 사는 것이 힘겹다면, 혹은 말하지 못할 슬픔이나 분이 마음에 있다면 하나쯤 악기를 연습해 보자. 처음엔 연습과 비례하지 않는 실력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시간을 들여 음악 그리고 악기와 가까워진 만큼, 더 긍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명수(이과대·물리18)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3·1혁명 100년과 ‘건국’의 뜻 손석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3·1혁명’이란 말은 100년이 넘도록 여전히 낯설다. ‘3·1운동’이 귀에 익어서다. 신문과 방송이 노상 그렇게 보도해온 탓이다. 단순히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적잖은 사람이 그 역사적 위상을 정확히 짚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3·1운동’이라 부르면 학문적이거나 객관적이고, ‘3·1혁명’이라면 가치가 개입되거나 주관적이라 인식할 문제는 아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문제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 보수적이라는 임시정부도 ‘3·1운동’보다 ‘3·1혁명’을 자주 썼다. 이 짧은 글에서 ‘운동’이 아니라 ‘혁명’으로 써야 옳다고 고집스레 주장할 뜻은 없다. 다만 운동이 아니라 혁명이 옳다는 역사적 논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했다. 9년 만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은 제국의 복원을 바라지 않았다. 황제복위 운동도 없었다. 왕조를 되찾자는 사람들은 흐름을 이루지 못할 만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민중의 외면을 받았다. 만세 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독립해 건국할 나라가 ‘왕의 나라’ 아닌 ‘민의 나라’임을 공식 선언했다. ‘혁명’의 이름에 값하는 까닭이다. 독립선언문을 읽어보면 선인들이 건국하고 싶은 나라가 확연히 드러난다. 선언문은 들머리에서 “조선 사람은 자주적 민중임을 선언”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자손만대에 일러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길이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자주민으로서 조선인의 ‘정당한 권리’만 강조한 게 아니라 ‘인류 평등의 큰 뜻’을 강조했다. 그날 거리에서 목숨 바친 선인들의 꿈이 100년이 지난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었는가를 짚어보자. 독립선언문이 가장 두드러지게 내건 ‘자주’와 ‘평등’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절실한 과제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 온전한 ‘자주’도 ‘평등’도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다. 오늘의 풍경을 100년 전 3월의 정신으로 돌아가 성찰해보자. 과연 만세운동에 나선 선인들은 그 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수백만 명을 죽이고, 그 이후에도 내내 적대시하며 천문학적 군사비를 탕진해온 못난 현실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더 큰 문제는 분단된 남과 북의 민주주의가 각각 온전한가에 있다. 남쪽에서 무장 커져가는 빈부 차이, 북쪽의 당 고위 관료와 일반 민중 사이의 불평등은 엄연한 현실이다. 3·1혁명 이후 100년이 흐르도록 그날의 꿈이 온새미로 이뤄지지 않는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옳을까. 독립선언문은 당시 2천만 겨레구성원 모두에게 저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으라고 촉구했다. 국내 사립대학 가운데 건국대는 재단이 친일의 오점이 없는 드문 대학이다. ‘건국인’들이 1919년 건국의 뜻을 새삼 자부심을 지니고 깊이 새겨보아도 좋을 이유다. 손석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만평] 박제정 기자 j213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박가은 부편집국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억압받던 선조들이 독립을 외치며 대한민국이 시작됐다. 3·1운동은 평화만세시위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해 건국의 매개가 되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피해자가 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이다. 지난 2월, 문희상 국회의장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일왕은 ’위안부’ 할머니들께 진심으로 사과 하라’고 했던 발언이 이슈가 됐다. 이에 대해 일본은 ‘유감이다’며 되려 사과를 요구했고 일부 언론에서는 문희상 의원의 인격모독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본이 ‘위안부’ 할머니들께 피해사실에 대한 보상을 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시절 이뤄진 한일합의 보상금과 지난 해 해체한 화해치유재단의 위로금 등을 통해 재정적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한평생 안고 살아온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에 대한 실질적인 위로와 배상은 감감 무소식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소리 없이 짓밟힌 인권에 대한 명예회복임에도 말이다. 국내외 일부 정치인들은 역사와 정치를 혼동하며 사과발언에 난색을 표하기도 한다. 문희상 의원의 사과 발언이 한일관계를 더 악화시킨다며 우려를 표한 것이다. 정치인의 발언이 외교관계에 큰 오해의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발언의 속뜻을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한일관계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한다. 이제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단어에 위화감이 줄어든 평화로운 시대이다. 전쟁이 없던 기간동안 남아있는 자들은 독립을 위해 힘쓴 선조들을 추모하고 기렸다. 100년이 흐르는 동안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점점 없어지고 피해를 증언할 ‘위안부’ 생존자들 또한 절반 이상 줄었다. 현재 남아있는 생존자들조차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기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독립열사들과 전쟁의 한 귀퉁이에서 희생당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평생 맺힌 한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기 위해 역사를 바로 알고 후세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잘못된 역사가 있다면 진심으로 뉘우치며 반성하는 것 또한 남아있는 자들이 도의적 책임을 가지고 해야할 일이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선조들이 독립을 위해 흘렸던 피와 땀을 다시 생각해보자. 박가은 부편집국장 qkrrkdms92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처음엔 다 그래 가동민 편집국장 지난 4일이 되면서 새 학기가 시작됐다. 처음으로 대학에 오는 사람도 있고, 처음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으로 서울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처음’이라는 말은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설레고 기대되게 한다. 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낯선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한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 당연히 설렘과 걱정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2019년이 되면서 편집국장으로 임명됐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감투이기도 하고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부담도 됐다. ‘내가 건대신문을 하나 되게 할 수 있을까, 좋은 방향으로 잘 이끌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전 편집국장님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정기자 혹은 부장 기자로 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실수하지 않도록 모르는 것들을 알아보며 열심히 준비했다. 지난 1월 편집국장으로서 첫 신문을 기획했다. 역시나 실수투성이였다. 스스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책하고 있을 때 동료 기자들이 “처음이어서 서툰 거지 나중에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거야”라며 위로해줬다. 그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찌보면 이런 실수들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면 부족한 부분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처음 시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철저히 계획하고 이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계획대로 쭉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금방 지쳐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은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경험한 일로 인해서 포기하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걱정하기보다는 자신감을 갖고 임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세운 올해의 목표를 비롯해 새 학기 혹은 첫 직장에서 자신의 계획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가동민 편집국장 syg10015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지금 마주하고 있는 직원은 고객님의 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박다은 대학1부장 “지금 마주하고 있는 직원은 고객님의 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고객들의 갑질에 고통받는 직원들을 위해 일부 사업장은 이런 멘트를 써붙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다. 특히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갓 성인이 된 알바생들은 크고 작은 갑질에 아주 자주, 회의감을 느끼곤 한다. 이 탓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서는 일명 ‘진상’이라 불리는 고객들을 응대한 경험에 대한 한풀이가 빠지지 않는다. 경험담을 풀어놓다 보면 도무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진상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지기 일쑤다.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는 고객부터, 획기적으로 신선한 갑질을 선사하는 고객까지. 고작 8,350원에 자존심이 팔려나간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혹자들은 아르바이트 중 갑질에 시달려 속앓이를 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사회생활 제대로 해보면 그건 별거 아니다”, “다 좋은 경험이 될 거다”라는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 일리있어 보인다. 우리가 살아나갈 세상은 더 각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일리 있는 세상에 산다는 걸 직시하는 순간, 더 비참해진다. 현실의 냉정함을 너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뎠는데, 너무 힘든데, 나아갈 사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닐 만큼 더 냉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사회를 바꿀 순 없을 것 같다. 바뀌지도 않을 것 같다. 근데 사실 이제 막 시작하며 상처받는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건 현실적인 조언도,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 거창한 혁명이나 변화도 아니다. 쌀쌀맞은 고객 뒤, 힘내라든가, 고맙다든가 하는 말을 건네는 다른 고객의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륵 풀리고 위로받은 느낌까지 드는 경험을 꽤 많은 알바생들이 해봤을 것이다. 가끔 각박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하다고 느끼게까지 된다. 그러다 보니 알바생이 아닌 고객의 입장으로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도 말 한마디를 따뜻하게 내뱉으려고 노력하게 되곤 한다. 지친 나에게 희망을 준 누군가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딱 한 마디의 따뜻한 말이 모여, 이제 사회로 발돋움할 이들이 상처부터 받은 채로, 세상을 신뢰하지 않은 채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론 기업이나 고용주의 차원에서 알바생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 그게 바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일인 것 같다. 뭐 거창한 말이 따뜻한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 ‘고맙다’는 말로도 충분하다. 물론 싫다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그저 ‘따뜻한’ 한마디가 싫다면 적어도 ‘차가운’ 한마디를 던지진 말자. 너무 이상적인 말일 수 있지만 모두가 노력해주면 좋겠다. 자신이 지불하는 그 대단한 돈으로 절대 사람의 인격을 해칠 권리까지 살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모두가 아는 그날까지. 박다은 대학1부장 daeunn011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시사]조선인의 절규, 세계인의 시선 사진 이준열 기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제국주의가 팽배했던 1919년, 3월 1일의 외침은 식민지를 일깨웠으며 제국주의에 대한 경종이 됐다.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움직임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세계에 알려졌고, 외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며 한반도가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3·1운동은 많은 식민지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게 됐다. 100년 전, 세계인들은 3·1운동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올해 3월 1일 광화문 광장에서 거리 행진하는 시민단체/사진 이준열 기자 韓- 국내의 모든 신문 폐간됐으나 지하신문 만들며 분투 국권 상실 이후 일제는 한국인이 운영한 신문을 폐간시켰고, 《매일신보》를 남겨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시켰다. 3·1운동 당시 매일신보는 이 운동을 폭동으로 폄하했다. 폐간된 신문 중 하나인 《제국신문》의 사장이었던 이종일은, 3·1운동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민족대표 33인의 구성원이 었다. 그는 《조선독립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창간호에 33인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후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는 내용을 실어 독립선언서와 함께 탑골공원에 배포해 3·1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조선독립신문》은 “민족대표는 조선을 위해 희생하니 이천만 민족은 최후의 사람이 남더라도 결코 난폭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민중에게 평화 시위를 강조했다. 이종일은 창간호 직후 잡혀갔으나, 발간은 40호가 넘게 진행됐다. 일제의 전반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신문》과 같은 지하신문은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대학 한상도 교수는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위해 무단통치 정책에도 불구하고 종교 단체를 크게 탄압하지 않았다”며 “주로 종교 단체에 소속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들고 지방 민중의 참여를 독려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조선독립신문》창간호/출처 부산박물관 日- 무단통치의 한계를 실감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언론들은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하거나 같은 논조의 사설을 냈다. 독립운동을 종교지도자 및 외국인 선교사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축소 보도하며 조선인을 ‘폭도’와 ‘범인’으로 몰아갔다. 4월 16일《아사히신문》은 “조선은 일본법률에 따라 안전하게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흉기를 들고 관아에 방화하는 등 인도를 파괴하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며 “이런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되자, 일본언론은 취지를 약간 바꾸었다. 4월 14일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정의와 인도의 넓은 지대에 입각하여 인류의 이름으로 주민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것을 기약하기에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의사 감정의 충돌이 있을 리 없다”며 “고도의 문화는 동화의 열매를 맺을 것이며, 이는 조선통치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랴”고 문화적 자치주의를 설명한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이규수 성균관대 교수는 “이 시기 일본 언론보도의 특징은 3·1운동의 발생 원인을 총독정치의 폭압성에서 찾으려는 논조가 대두되었다는 점이다”며 “무력진압만으로는 통치에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압적 동화주의’에서 ‘자치적 문화주의’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의 변화가 일본 내부에서 제기된 것이다. 中- 5·4운동의 기폭제가 된 3·1운동 3·1운동은 중국의 매체들이 전면적이고 깊이 있는 보도가 이뤄지며 세계에 알리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의 《매주평론》은 3월 23일 자 신문에서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의 수천의 군중이 학생의 인도 아래에 독립 만세를 부르고 일본 정부와 군대는 조선에서 떠나라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또한 개성·평양·남포 등 각지에서 항일의 분노가 일었으며, 혈기가 있는 조선사람 중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는 이가 없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중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중국의 이권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강수옥 연변대 교수는 논문에서 “3·1운동 후 중국 각지의 매체는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며 한국인의 항일투쟁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며 “심지어 당시 중국의 사회 형세 및 국민의 정신 상태를 3·1운동과 비교하며 중국의 혁명운동에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3시간에 1천명이 학살됐다는 내용을 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오른쪽은 총 1만명이 학살됐다는 다른 내용의 기사/출처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美-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인 미국, 일본의 잔학성에 경악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합병을 인정했고, 1차대전 승전국으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일본과 가까운 서양 열강들은 3·1운동을 폄훼하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뉴욕타임즈는 3월 20일 사설에서 “한국과 이집트는 자체 정부의 무능력으로 영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됐다”며 지배가 정당하다는 논조의 글을 썼다. 그러나 다음 날 임시정부 정한경 외무위원은 “능력이 없다는 하에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어린 여자아이에게 수영을 배워야 한다며 물가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며 위 사설을 반박하는 글을 뉴욕타임즈에 기고했다. 친일적 보도는 일제의 반인륜적인 행위가 알려지며 사라졌는데, 제암리 학살사건이 알려진 것도 그들의 고발 때문이다. 한상도 교수는 “미국과 캐나다의 선교사가 특히 한국에 많았는데 워싱턴과 동경에 실제 상황을 전보를 알렸다”고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는 4월 6일 자 1면 전체를 3·1운동에 할애했고, 4월 24일, 뉴욕타임즈는 “한국인의 자치능력은 부족한 것으로 여겼지만 최근 놀라운 애국심과 자제력, 조직 능력을 보였다”며 미국의 바뀐 여론을 보여줬다. 논문에서 고정휴 포항공대 교수는 “뉴욕 타임즈는 1919년 한 해 91건의 한국 관련 기사에서 69건이 3·1운동과 직접 관련된 기사”라며 “독립선언문을 번역하고 「세계개조 연대기」의 1919년에 3·1운동을 포함시키며 역사적 의의를 드러냈다”고 밝혔다. 3·1운동, 세계의 흐름에 변동을 주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의 열강은 대부분 일본 정부의 입장만을 앵무새처럼 보도했지만, 프랑스의 경우 파리강화회의의 주최였기에 3·1운동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일간지 《뤼마니테》는 4월 13일 자 3·1운동을 ‘혁명’으로 칭했고, 많은 언론이 3·1운동을 객관적으로 보도했다. 동남아와 중남미에서도 3·1운동은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세계로 거의 퍼지지 않았는데 비해 3·1운동은 비교적 자유로운 보도가 이루어졌는데, 서구 열강과 달리 동양 일본의 세련되지 못한 식민지 관리를 비꼬며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했던 서양의 노림수라는 것이 이유로 지적된다.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3·1운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조선과 달리 자신들은 양심을 갖고 행동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적극적인 항 외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조선인들은 완고한 독립 의지를 갖고 있음을 전 세계에 보이며 위상 있는 임시정부가 들어설 수 있게 됐고, 해외에선 중국의 5·4운동, 인도와 대만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준열 기자 index545@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목록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83 Next / 83 GO / 83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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