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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대항쟁, 66시간 50분의 외침
“어쩌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겠어요”
10.28 건대항쟁에 참여한 오도엽(경제ㆍ86)시인은 시<기억하지 않아도 기념하지 않아도-스물의 청년이 된 시월이십팔일 생 건대항쟁에게>에서 최동근(경제ㆍ84)동문을 기억하며 “검게 불타 화상을 입은”이라 적었다. 경찰의 강경 시위 진압에 맞서 사회과학관(현, 경영대)에서 끝까지 투쟁하며 66시간 50분을 버틴 최 동문은 인터뷰 중 당시를 기억하며 “불의에 맞서 싸웠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66시간 50분 동안 우리가 걷고 있는 캠퍼스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더위에 드러난 최 동문의 팔과 다리엔 아직도 선명한 10.28 건대항쟁의 외침이 새겨있다. 전경의 진압봉에 맞아 기억을 잃을 정도로 격렬히 불의에 맞서야 했던 86년 가을, 그 뜨거운 현장의 기억을 <건대신문>이 최 동문과 주승혜(영문ㆍ85)동문에게 물었다.
Q. 1986년 10.28일부터 66시간 50분 동안 건국대학교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최 동문(이하 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대항쟁은 ‘준비된 농성’이 아니었단 사실입니다. 애학투련의 당초 목적은 결성식을 통해 사회에 학생들의 통일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농성은 전경의 강경진압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물론, 결성식을 전경으로부터 사수하기 위한 준비는 있었습니다. 애학투련이 연세대에서 열린다고 거짓정보를 흘리거나, 혹여 있을 전경과의 충돌에 방어선을 미리 구축하거나, 건대 본관(현, 행정관) 앞에서 결성식이 무산됐을 경우 학생회관과 공대 사이에서 결성식을 진행하는 방안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성을 위한 준비는 전혀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나름의 준비 끝에 결성식은 시작됐습니다. 오전에 학교별 참가인원을 조사했는데, 제 기억으론 3000여 명 가량 모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경들이 들어 닥치기 시작한 건 결성식이 끝나갈 무렵이었죠. 특히 건국대 부속 고등학교방향에서 물밀 듯이 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본관에 있던 학생들은 포위됐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근처 건물이었습니다. 본관은 물론, 사회과학관, 이과대(현, 법과대), 학생회관, 도서관 등 전경의 포위망 안에서 건물로 숨었습니다. 우리대학 학생인 경우, 학생증을 보여주고 포위망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타대학생인 경우는 그게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전경에게 잡히면 바로 구타와 연행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사회과학관으로 몸을 피했는데, 처음만 하더라도 하루정도 뒤에 전경이 빠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전경의 포위로 인해 농성이 진행된다면 하루 뒤에 상황이 해제 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예상한 것이죠. 하지만 9시 뉴스에 애학투련의 대자보나 홍보물을 왜곡 보도하며 저희를 ‘좌경용공 세력’으로 모는 것을 보곤, 심상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저희는 농성으로 이어질 줄 몰랐기에 먹을 음식도 몸을 데울 땔감도 없어 농성이 길어진다면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경의 포위망은 3박 4일간 유지됐습니다.
방송을 통해 저희를 좌경용공 세력으로 몰은 이튿날부턴 투항하라는 방송과 함께 헬기로는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이 전단지를 들고 나오면, 선처해주겠다는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구속이 됐던 수많은 학생들은 더욱 뭉쳤습니다. 심지어 본관에선 결성식에 사용한 앰프를 통해 “투항하라”는 방송에 맞서는 방송을 하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란 팜플렛을 걸기도 하며 맞섰습니다.
이렇게 저희는 포기하지 않고, 불의에 맞섰습니다. 사회과학관에선 주인아주머니가 없는 매점에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가져갑니다”란 쪽지 함께 돈을 모아 올려놓고, 음식을 가져다 먹기도 하면서 말이죠. 도서관에선 공부를 하러 온 학우의 도시락을 같이 나눠먹기도 했습니다. 또,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학생들은 서적이나 주요 기물들엔 손대지 않았습니다. 전경이 학교 벤치를 부셔서 땔감으로 사용한 모습과는 대조적이죠.
Q. 농성은 어떻게 마무리 됐나요?
최: 이렇게 소모전이 계속되자 4일째 되는 날 전경과 *백골단의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과학관은 마지막에 진압됐는데, 대부분 백골단이 투입돼 진압의 정도가 심했습니다. 사회과학관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옥상이 아닌 5층 계단에서 전경과 맞서자는 계획을 세웠죠. 하지만 진압 중 화재가 발생했고 모두 옥상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마지막까지 계단에서 물품을 옮기고 있었는데, 순간 불길이 솟으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화상을 입게 됐죠. 그렇게 정신을 잃었지만, 딱 하나 기억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워 있는 저를 학우들이 옮기는 중, 백골단이 휘두른 진압봉에 맞아 계단에 구르며 잠시 정신이 들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살아있는 게 다행이죠. 그렇게 농성은 전경의 폭력에 마무리 됐습니다.
주 동문(이하 주): 저는 전경의 포위 당시 학생회관으로 숨었는데, 학생회관은 결성식이 있던 본관과 거리가 멀어 비교적 적은 3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4일째 진압과정에선 남학우들의 보호를 받아 다른 학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맞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휘두르면 남학우들이 몸으로 막아주었죠. 하지만, 당시 전경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모습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죠. 너무 무서웠고, 두려워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멍하니 서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건대항쟁 진압의 마지막입니다.
Q. 현 대학생들은 건대항쟁을 어떻게 기억해야할까요?
주: 우선 제가 기억하는 건대항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정부는 애학투련을 일순간 ‘빨갱이 집회’로 만들어 버렸고, 우리의 명예가 실추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명예는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건대항쟁의 4일의 기억은 어쩌면 제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그렇게 하나 되어 마음을 모을 수 있을까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고, 그로인해 제 인생은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애학투련의 외침은 30년 전 끝났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건대항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남겨두지 말고, 현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울로 바라봐줬으면 합니다.
*백골단 : 1980∼1990년대 학내 시위자들과 시위 군중들을 진압하고 체포하기 위해 구성된 경찰부대를 일컫는 별칭으로, 대부분 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이 특채되어 구성됐다.
※이 기사는 건대항쟁 30주년 특집 연재기사입니다.
정두용 기자 jdy2230@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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