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문화상 웹툰 부문 당선작]바다와 나비 배유진(예디대·커디18)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소감]제 당선소감은 건너뛰셔도 상관없습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저는 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공대생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공대생이 소설을 쓰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잖아. 네 맞습니다. 공대생이 소설을 쓴다고 해서 대단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공대생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조금 특이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쓰게 된 계기는 작년 2학기에 문화콘텐츠 학과 한소진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였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소설을 쓰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저는 본격적으로 제 진로에 대해 가족 혹은 지인들의 상담을 받았습니다. 저는 나름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토로했지만. 처음 돌아온 대답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을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제게 다른데 한눈팔지 말고 전공에 신경 쓰라는 말이나. 일단 전공부터 우선적으로 하고 글은 나중에 여유가 될 때, 취미로 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게 공대생으로서 글을 쓰면서 맞이한 벽이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조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열심히만 하면 나름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되는 학과를 다니고 있으면서 되지도 않는 가능성만 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부분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시키는 대로 공부해서 적당히 성적 유지하고 전공 관련 외부 활동들 하다 나름 이름 있는 기업에 취업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게,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분야에 뛰어들어 수 없이 많은 이들과 경쟁해 승리하는 것보다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자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문학 전공자들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수상 소감을 남기자면 이번에 제게 과분한 상을 주신 건대신문 관계자분들과 심사위원이셨던 김홍신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파블로프의 초상 아침, 내가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서재에서였다. 나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으로 손잡이를 내리쳤다. 계속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바닥은 젖어있었다. 피였다. 시체가 있었다. 집주인이었다.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화약 냄새가 났다. 피가 바닥을 적셨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사이렌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집주인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는 내 재당숙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집주인 혹은 조쉬아 씨라 불렀다. 그가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서로 어색했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에 가깝다. 집주인은 다른 누군가와 오래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해 나름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다. 단지 그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람보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2편 이후의 람보를 싫어했다. 가끔 지역 방송에서는 람보 2를 틀어주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화를 내며 리모컨을 던졌다. 그의 목에는 선명하게 핏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가 했던 말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저건 거짓말이야. 만약 정말로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면, 절대 저렇게 행동할 수 없어! 저 망할 영화 제작자 놈들이 지금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의 집에 얹혀살았다. 유학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 차분한 사람이었다. 화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서웠다. 붉게 충혈된 눈, 쉬어버린 목소리. 그런 그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집주인은 일과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냈다. 내가 오기 전까지도 그는 집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 가정부를 고용했다고 했다. 그의 집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고정적인 수입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정부를 고용하는 건 사치였다. 적어도 당시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서재에는 낡은 턴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것을 틀었다. 얼마나 소리를 크게 했는지 아래층까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집주인은 소리에 민감했다. 아니 소리를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동차 엔진 소음, 불꽃놀이 폭죽 소리 등이 들릴 때마다. 그는 패닉에 빠졌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나 또한 괴로웠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어렸을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곳, 내 고향을 떠나 누님을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결국 오늘까지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누님 저는 내일이면 떠납니다. 아마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땅과 집을 모두 팔았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일지. 가족을 버리고 누님과 어딘가로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습니다. 그건 누님의 의지가 아닌 제 고집일 뿐이란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직접 만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럴 시간이 남아있질 않네요. 그래도 앞으로 계속 이 주소로 편지는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집주인의 집안은 대대로 지주였다. 그가 살던 일대의 대부분 땅이 그의 어머니의 소유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성적도 우수했다. 성격이 모나지 않아 대인 관계도 좋았다. 하지만 그가 이민을 가게 되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직접 내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좋았던 기억을 얘기해준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내가 좋았던 일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기만 했다. 그 과정은 부자연스러웠다. 누님, 혹시 파블로프를 기억하시나요? 아버지께서 제 생일선물이라서 집으로 데려왔던 그 늙고 못생긴 개 말입니다. 제가 그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면 누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저희를 바라보곤 하셨죠. 저는 그 개가 싫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있어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며 살아가길 포기하고 주인에게 복종한 채, 나이만 들어가는 비굴한 피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개랑 자주 놀아줬던 건, 그래야 누님께서 미소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파블로프가 죽었을 때, 제가 무덤 앞에서 울자 아버지는 “사내가 돼서 그깟 개새끼 한 마리 죽은 거 가지고 울고 있느냐.”라며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를 겁니다. 그때 제가 그때 울었던 이유는 이제 누님의 미소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란 사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우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학위라는 장식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숨기고 허세에 취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누군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이해한 척 공감하는 척하는 오만한 위선자, 그게 제가 당시에 제가 봐왔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종종 신문에서나 보던 사람들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까지 찾아왔던 걸 보면 나름 영향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나름 차관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니까요. 아무리 그가 도덕적으로는 틀린 사람이라도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거겠죠. 하지만 역시 저는 그 사람이 싫습니다. 그는 제가 누님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님과 떨어져 이곳에서 살게 한 장본이었습니다. 제가 누님과 같이 있던 것을 그에게 걸리는 날에는 방에 갇혀 매를 맞곤 했습니다. 그는 저를때리면서 ‘누님’ 같은 건, 저에게 필요 없다. 그런 건 쓸데없는 미련만 남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대들었고 그럼 그는 저를 옷장 안에 가둔 뒤 옷장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제발 꺼내 달라고 목이 갈라질 정도로 울부짖어도 그는 저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밖으로 나가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는 마치 자신은 자식을 사랑하는 다정한 아버지인 척 자식들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척, 입을 놀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인간의 유전자에서 누님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집주인의 침실 짐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열쇠 꾸러미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꾸러미에는 세 개의 열쇠가 걸려있었다. 모두 같은 열쇠였다. 하나는 긁힌 자국 많았지만 멀쩡했다. 나머지 두 개는 심하게 녹이 슬어 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였다. 방문 열쇠랑은 달랐다. 일단은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짐들을 모두 거실로 꺼냈다. 모든 방에 있는 그의 짐들을 거실로 꺼냈다. 그리고 그의 유품을 종류별로 구분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 그의 서재에서 놓고 온 짐이 있다는 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이 집의 다락방은 서재를 통해 가야 했다. 집주인은 내가 서재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불안해했다.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집주인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재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다락방의 존재로 잊어버렸다, 나는 책장을 옆으로 옮겼다. 그 뒤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나는 벽면에 전기 스위치를 켰다.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등은 상당히 밝았다. 교체한지 얼마 안된 듯했다. 다락방은 의외로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오래된 묵은 먼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여러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나는 상자들을 전부 거실로 옮겼다. 대부분의 상자들은 열어본 흔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한 상자만 열어본 흔적이 있었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였다. 상자들은 대부분 철로 되어 있었다. 녹이 슬어 열기 힘들었다.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앨범들과 일기장, 군복 그리고 전화번호 목록과 편지들이 있었다. 제가 성인이 되기 석 달 전, 저는 집을 나왔습니다. 제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죠. 누님 이곳은 제가 살던 곳이랑 너무나도 다릅니다. 적응하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더군요, 몇 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이곳에는 제가 있을 곳이 없었어요. 중학교에 갔을 때, 그곳에 저 같은 동양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일본인 한두 명 정도뿐, 대부분 흑인이나 백인이었죠. 그곳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찢어진 눈을 만들어 놀리는 건 양반이고, 대놓고 노란 원숭이라 부르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사라 하는 작자는 그런 것에 대해 말 몇 마디만 할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한국이 생각납니다. 좋은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겠지요. 한국에서는 누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 노력했습니다. 제가 뭔가 잘하는 게 있다면 그들도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공부와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운동을 잘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의지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시험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받았던 때였습니다. 제 성적이 공개되고 백인 아이들은 저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괴롭힘도 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그들은 저희 동양인들이 당연히 자기네들 보다 뒤떨어지는 인종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그들이 저를 괴롭힌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거겠죠. 그동안 자기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뒤처진 거니까. 정작 자신이 노력해서 이기는 건 쉽지 않고 그래서 대신 저를 몰아세우고 괴롭히면서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습니다. 그건 시작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그들은 제 왜소한 체구로는 팀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저를 거부했지만 저는 이미 그 팀에는 저랑 비슷한 체구의 선수가 이미 있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조금이라도 친해지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썼습니다. 스스로 혐오하는 행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을 걸어와 가식적인 짓거리들을 해댔습니다. 정말로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려 했지만 저는 꾹 참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저한테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아버지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결정을 할 수 있을 뿐. 제가 집을 나가려고 생각했던 건, 고등학생 때 부터였습니다, 저의 노력은 형식적인 거리만 좁혔을 뿐, 본질적인 것을 바꾸는 데에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힘을 잃고 과거의 영광과 주변의 시선에만 매몰되어 부패하고 있던 게, 그 이유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나갈 수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성년자였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법적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소한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하길 기다렸고 그 결과 이번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의 사진이었다. 그중에는 집주인도 있었다. 부대에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편지 뒤에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돼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군복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집주인이 개명하기 전 이름이었다. 편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집주인의 전 동료들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어떤 전쟁에 참여했던 것인지. 왜 그동안 그런 반응들을 했던 건지. 나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물었다. 알고 있었는지. 아버지는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 나는 다시 물었다.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대답했다. 이제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편지를 전부 읽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편지 뭉치를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군복을 집어 들었다. 군복은 오랜 세월 동안 꺼낸 적이 없는 듯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곳곳에 벌레들이 먹은 자국이 선명했다. 옷 자체도 많이 삭아있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옷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상자가 눈에 밟혔다. 자물쇠로 잠겨있는 상자였다. 나는 그 상자를 집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는 자물쇠 구명과 일치했다. 나는 열쇠를 돌렸다. 자물쇠가 풀렸다.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편지봉투들이 있었다. 곱게 잘 밀봉된 편지들 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혼자 살기 위해 1년간 돈을 모았습니다. 아버지 몰래 모은 돈이라서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집을 나가 혼자 살기에는 문제없는 금액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여관에서 한 달 정도 묵고 나니 제 생각과 수중에는 지폐 몇 장 정도만 남았습니다. 갑자기 일주일도 못 버틸 정도로 돈이 줄어들어 버리자 살기 위해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 군인 모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로 군에 지원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저는 조롱거리로 인종차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크게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죠. 그동안 받아온 차별로 인해 면역이 생긴 탓에 더 이상 그런 인종차별을 당해도 스스로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건 정말로 신기합니다. 자신의 잘못임에도 저항하고 반발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찍어 누르려 하지만 순응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얼마 안가 무시하고 지나가거든요. 여기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를 조롱했을 때 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부분 금방 싫증을 느끼고 그만뒀습니다, 물론 더 심하게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선을 넘어 저 외에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줬고 그로인해 오히려 비난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베트남 파병을 가기 전, 저는 훈련과 함께 저희가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베트남의 공산당들을 무찔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베트남에 가기 전까지 교육받은 것만이 옳다고 믿으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깨닫는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고부터 밖을 나갈 때는, 권총 한 자루를 가방 안에 넣어 다니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얻은 조그마한 리볼버인데 이게 가방 안에 있어야지만 조금이라도 덜 불안한 마음으로 밖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서도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끈을 단단하게 붙들고 다닙니다. 그러다 한 달 전쯤 가방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날 밤에 심한 감기에 걸려 다음 날 시내에서 약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지프차를 타고 있는 군인이 제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프차의 엔진 소리와 군복을 입은 군인에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니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리며 가방과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머리를 잡아 뜯기 시작했고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리 지기 전까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웠음에도 머리를 뜯고 있는 손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의 손이 제 가방을 향해 다가왔는데, 그 순간 반사적으로 가방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밀쳐냈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끌어안고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불안정한 호흡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움이 심해졌지만 만약에 멈췄다가는 가방을 빼앗길지도 몰랐기에 죽을힘을 다해 달렸고, 그렇게 계속 달리다 다리가 풀려 도로에 넘어질 때쯤,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급하게 가방 안을 확인 했는데, 다행히도 가방 안의 리볼버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습니다. 그러자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고 저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잠에 들자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더군요. 그의 그런 눈빛을 참을 수 없어서 손을 휘저으며 제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쳤고 그러자 아버지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손을 뻗는데 그 눈에는 차가운 살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무서워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 순간 검붉은 사람 형상들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 저를 붙잡았고 아버지의 손이 제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깼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방 안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변을 둘러보며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안도의 한숨이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세면대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라디오의 전파 소리, 윗집에서 생활하는 소리들이 살려달라고 외쳤던 전우들의 비명소리, 베트콩들과 꼬마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왔던 총성들로 변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도 사리지지 않고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댔죠. 바닥에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누님, 지금 제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주일 전 샤워를 하고 나와 방에 걸려 있는 거울을 봤습니다. 그런데 거울 안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제가 베트남에서 있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던 아버지가 거울 안에 있었습니다. 거울 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보다 추악하게 변한 몰골에 광기에 지쳐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눈으로 저를 노려보던 그의 모습이, 제발 사라져달라고 외쳐도 그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뜨리시며 쏘아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매일 매시간 마다 저를 노려보시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혼잣말로 힘들다고 한다거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간 아버지께 혼날 것 같아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정신적으로 한계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결국 집에 있는 거울을 전부 버렸습니다. 요즘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아 좋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하지만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기에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친구 관계는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누님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저는 그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들과 지냈던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가 저를 포기하게 함으로서 그에게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도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해 버리다니, 역시 저는 아버지의 우둔한 변모를 닮은 것 같습니다. 상자 안에 있던 것들 또한 편지였다. 하나하나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 통투를 살폈다. 그러다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편지지에는 받는 이의 주소가 없었다. 보내는 이의 주소는 적혀있었음에도 말이다. 힌트는 하나였다. 누님이라는 단어. 겉면에 적혀있던 그 단어뿐이었다. 그 외에는 겉에 드러난 힌트가 없었다. 나는 문구용 칼을 꺼냈다. 밀봉을 풀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럽게 밀랍을 뜯어냈다. 편지지가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편지지를 떨어뜨렸다. 누구에게 온 건지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앞으로 어디서 지낼 예정이니” “나야 뭐, 여기서 계속 지내야지.” “찝찝하지 않겠어? 그래도 사람이 죽었던 곳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리고 나도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 남아서 찾아봐야 할 게 생겼거든.” 아버지는 못마땅한 듯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아직 방학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물론 집주인 물건을 정리해야 하는 것도 있다. 나 말고는 그의 물건을 정리해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의 장례식 준비도 남아있다. 집주인이 결혼을 안 한 탓에 나 말고는 없었다. 내가 그의 마지막을 챙겨줘야 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내가 다른 집을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누님, 저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누님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도 제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살인마입니다. 이제 교회도 다니지 않습니다. 이제는 신이란 존재를 정의란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정의란 명분하에 죄 없는 많은 이들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어른, 아이들, 노인, 임산부 누구든 상관없이 상부에 명령에 따라 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교육받았고 모든 건 미국과 세계의 정의를 위해서라며 스스로 합리화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많은 미군들이 그래왔듯 저희가 했던 모든 행위가 합당했단 것을 인정받고 전쟁 영웅으로서 미국 국민들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행위들을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막연한 믿음만을 따랐던 것이죠. 이건 제가 처음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는 베트콩들이 숨어있다는 마을에 침입해 베트콩 들은 숨지 말고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베트콩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집집마다 쳐들어가 베트콩들을 어디에 숨겼냐고 추궁했습니다. 물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다수가 집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침입했던 집에는 어린아이 두 명과 어머니 그리고 노쇠한 노파만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울기만 하고 노파와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렸고 제 선임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그는 화를 내며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모두 쏴 죽였습니다. 총성과 함께 여자의 피가 제 얼굴에 튀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저는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악몽을 꿨습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들어오며 보이는 여자의 얼굴. 누님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에게서 누님의 얼굴이 겹쳐지더니 여자의 시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왔습니다. 걸을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고 제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자 피범벅이 되어 죽은 그녀의 아이들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대로 넘어졌고 여자가 제 목을 조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죽지 않았을 거야, 네가 우리를 죽인 거야. 모두 너 때문이야.”라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숨이 막혀오다 정신을 잃고 악몽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혹시나 아직 꿈인지 아님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목과 발목을 확인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악몽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마치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사실상 패전한 상태로 미국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를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기대했던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예와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저희에게 남겨진 것은 전쟁에서의 상처와 살인자라는 낙인뿐 이었습니다. 아무도 저희를 이해해주거나 공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멸시와 혐오 그리고 증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베트남 파병 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누님, 누님도 혹시 저를 살인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편지를 읽고 제가 행했던 일들로 인해 저를 혐오하게 되셨나요?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주세요. 누님마저 저를 부정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 그리고 정의를 얻어 올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해 일했습니다. 절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제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런 거라니,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왜 제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죠. 제발 누님 부탁입니다. 당신만은 저를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동정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미워하지만 말아주세요. 네, 맞아요. 저는 파블로프와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며 살아가길 포기하고 국가에 복종하며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상처를 끌어 앉고 살아왔고 앞으로 영겁의 시간 동안 죄책감을 짊어지고 속죄하며 살아갈 겁니다. 문득 누님이 전에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집마당에 있던 오래된 벚나무에 핀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벚꽃의 꽃망울보다, 힘을 다하고 죽어 아래로 떨어지는 벚꽃 잎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죽음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다음 날 누님이 갑자기 제 눈에서 사라져 버리실까 두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누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셨던 것인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서웠습니다. 누님께서 그런 말을 하신다는 것이. 그때 누님께 이런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누님은 벚꽃이 아닌 사람이라고. 그리고 사람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칠 때, 버거울 정도로 아름다운 생명력을 내뿜는다고. 하지만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어쩌면 아버지가 그러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지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누님께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 스스로 봐오고 경험한 것들이 있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끔찍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으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검붉은 덩어리가 될 뿐입니다. 인간이 가진 생명력과 넘치는 가능성이 일순간에 사라지며 공허함만이 그곳을 매우는 것, 그게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제발 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러스트 박제정 기자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 걸어봤지만 여전했다. 상자에서 편지를 전부 꺼내자, 가장 안쪽에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은 상당히 오래된 듯했다.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색이 거의 벗겨져 있었다. 사진을 뒤집었다. 글자가 써져있었다. 겨우겨우 알아볼 수만 있는 수준이었다.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사진.’ 다른 건 없었다. 오직 그 한 줄뿐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나마 관찰할 수 있는 건 치마를 입은 소녀와 그 옆에 서있는 어린아이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둘이 누군지를. 이미 편지를 읽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사진 속 소녀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 소녀가 집주인에게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어머니라면 약간이라도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한테 문자가 왔다. 나는 편지 속 소녀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도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고 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물었다. 어머니는 없다고 대답했다. 집주인의 집은 예전부터 외가랑 교류가 없었다. 그게 이유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외가랑 교류를 했었다면 내가 그를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이 편지들을 원래 주인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편지봉투를 집었다. 마지막 편지였다. 저는 죽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특히 지금 같이 죄인, 괴물인 상태로 죽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만약에 죽는다면 사람으로서 죽고 싶었습니다. 누님 같은 아름답고 무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연옥에 가뒀습니다. 언젠가 제 죄를 용서받고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며 연옥 속에서 그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오늘로서 끝날 것 같습니다. 오늘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제 평생을 기다려 온 편지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지요. 내용은 누님도 아실 겁니다. 이 편지를 읽고 저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미련을 버렸습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괴물인 채로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한 혁명과 가능성을 위한 의지,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공허한 상태로 저는 스스로에게서 해방될 것입니다. 누님, 이기적이었던 제가 마지막으로 누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떠나면 누님은 저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제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평안하시길, 제가 알고 있는 그리고 지금 그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잉크가 마른지 얼마 안 된 편지 뒤에는 집주인이 남긴 마지막 전언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금 이 편지를 읽으신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누님이 읽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찢거나, 불에 태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누님께 이 편지를 전할 수 없을 겁니다. 누님과 누님의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말이죠.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더러운 피가 몸속에게 흐르고 있는 괴물이 오직 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으로서의 저의 모습을 잃어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사실은 오직 제 마음 속에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이것을 외부에 알리려 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 사람에게 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연관됐었던 모근 사람들에게 죄송했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특히 저로 인해 큰 부담을 지게 됐을 그 아이에게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이대로 괴물인 채로 죽는 것이 무섭지만 어차피 사람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찾아오지 않았다. 나 혼자뿐이었다. 편지는 그의 유언대로 했다. 전부 태웠다. 사진도 같이 태웠다. 그의 흔적들이 천천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보다 더 적막했다. 서재의 피는 전부 지웠다. 그의 짐들도 다시 다락방에 가져다 놓았다. 편지가 담겨있던 상자만 제외하고. 나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조쉬아 씨는 왜 굳이 편지를 다시 다락방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정말로 누군가 이걸 처분해 주길 원한 게 맞긴 한 걸까” 내가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모순만 늘어갔다. 나는 서재로 향했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펜과 종이를 집었다. 그리고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박민수(공과대·전전17)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만평]청심에게 하고 싶은 말 박제정 기자 j213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조은평 문과대 철학과 강사 모교인 건국대에서 수업을 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10년 내내 강사료가 49,700원이여도, 또 4대 보험과 6학점 강의를 보장해준다며 강사료를 6개월로 쪼개주는 기형적인 형태로 초빙교수를 뽑을 때도 아무 말 못했던 나. 심지어 성적입력이 늦을 경우 강사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1년 간 강의금지라는 조항을 신설할 때도 가만있었고, 그 대가가 부메랑처럼 마침 독감에 걸려 입력이 하루 늦은 내게 되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으로만 저항하며 안으로 골병들어가던 내 모습이 죄책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문제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몫이 없던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안정화된 제도적 질서를 비집고 비로소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늘 정치철학은 안정화된 정치질서를 유지하려고 실제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나름의 몫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도록 잘못된 셈법을 고안해왔지만 말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대학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만 보더라도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대학의 구성원들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내년 시행될 강사법에 대비해 이미 대학들은 강좌수를 줄이거나 대형강의로 통폐합하고, 졸업학점을 줄이면서 시간강사를 대량해고하는 전략에 돌입한 것 같다. 강좌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전체 강좌비용의 1~3% 정도만 지불되는 강사의 인건비. 그런데도 교원지위보장과 방학 중 강사료 지급, 4대 보험 등을 핵심으로 하는 법 시행을 앞두고 몇몇 대학은 앞으로 부담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퍼트릴 뿐, 정작 학생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고맙게도 랑시에르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 하나를 전해준다. 노예들의 반란 이야기. 스키타이족은 노예들의 두 눈을 멀게 해 길들였다. 하지만 주인인 전사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난 사이, 노예의 자식들이 하나 둘 늘어나 멀쩡한 두 눈을 갖게 된 노예 후손들은 자신들도 전사로서 주인과 맞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노예들은 성 주변에 해자를 파고 전사로서 주인과 대적했다. 그런데 웬걸 주인인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어쩌면 이런 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간강사인 우리는 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었다는걸 자각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위 교훈처럼 단지 싸울 수 있다는 것만 깨닫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미 대학의 구성원이자 ‘정치’를 실현하고 구성할 수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그런 권리를 실현할 정치적 기반과 통로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조은평 문과대 철학과 강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사설]사총협의 요구, 일리와 우려가 공존한다 지난달 23일 우리대학 프라임홀 2층에서 열린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이하 사총협) 정기회의에서 사립대학 총장들은 참석한 유은혜 교육부장관에게 △강사법 개정 △등록금 동결 △구조개혁 평가 등 불만사항이 담긴 건의문을 전달했다. 내년부터 강사법이 개정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사립대학 총장들은 교육부에게 ‘재정난에 1년 이상 임용하기 어렵다’며 시간강사 인건비 등의 지원을 요구했다. 실제 우리대학도 내년 8월 1일부터 강사제도가 변경되면 추가적인 건강보험료와 퇴직금으로 매년 최소 3억 원 이상의 법정부담금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에서 강사제도 변경을 추진하는 만큼 현장에서 예측되는 문제점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재정 지원이 필요성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사총협에서 교육부에 요구한 사항 중 ‘등록금을 인상하는 대학에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 것을 개선해달라는 것’에 대해서는 일리와 우려가 공존한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이승훈 세한대 총장은 “등록금은 (법규상) 대학 통제 하에 있는 것인데, 만약 우리 전체가 등록금을 올리겠다고 하면 교육부가 재정 지원을 안 할 수 있겠느냐”면서 교육부가 등록금 인상과 재정 지원을 연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대학 역시 수년째 등록금이 동결돼 본부에서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등록금 인상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인지는 의문이 든다. 작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집계하고 교육부에서 분석한 ‘2017 교육지표’에서 우리나라 사립대학 등록금 순위는 미국, 일본, 칠레에 이어 4위로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직전 해에는 세계 2위를 기록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 사립대학들의 등록금 수준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사립대학들이 ‘등록금이 인상되면 교육부가 재정지원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단정하며, ‘사립대학 전체가 올리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들고 일어서는 것은 대학이 스스로 자구책을 내지 않고, 교육부의 재정 지원에만 매달리는 것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립대학들의 교육부에 대한 요구들 중 일부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등록금 관련 문제에 대해 사립대학 스스로 충분한 자구노력과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교육부 지원을 해결책으로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동의를 얻기 어렵다. 사립대학들이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교육부에 요구하는 것보다 먼저일 것이다.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사설]좋은 강의가 필요하다 강의는 연구와 더불어 대학의 존재 이유이다. 훌륭한 연구 못지않게 좋은 강의가 필요하다. 좋은 강의를 만들려면 매학기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도록 예화, 질문, 주제가 갱신되어야 한다. 신선하게 다가갈 새로운 사례를 찾아내고 때로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능력과 의욕을 갖춰야 한다. 좋은 강의는 배우는 학생들의 준비 상황을 보아가며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배우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학습 효과가 크다. 훌륭한 선생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참 좋은 강의를 들었다는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좋은 강의는 교수의 전문성이 돋보이고, 수업 내용이 알차고, 교수가 열정이 있고 학생과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저지고 적절한 과제가 부과되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교수의 수업 운영기술이 돋보이는 강의이다. 대학은 전문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므로 교수의 전문성은 너무나 중요하다. 경쟁력있는 전문성 확보는 좋은 강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가르치는 법을 탐구하지 않으면서 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새는 그릇이 가득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강의에 열정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교수 스스로가 강의를 즐기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가르치는 일을 즐기지 못하면서 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기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을 때 타인의 마음에도 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수강생의 준비상태와 강의 여건을 탓하기 전에 나의 열정은 충분한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터넷 강의를 통한 학습이 가능한 데도 왜 교수의 수업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공지능이 가르칠 수 없는 일은 바로 정서적인 소통을 통해 학생들에게 학습동기를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교수는 인터넷을 통해서 습득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귀를 먼저 열어주는 교수님, 애정을 갖고 학생들과 소통하는 교수님, 학생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교수님, 학생들의 요구사항에 귀를 기울여주는 교수님을 존경하는 스승상으로 응답한 답이 많이 나왔다. 학생들이 교수에게 기대하는 것은 배우는 내용에 대해 큰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의 안내자처럼 새로운 여행지를 소개해주어야 한다. 교수는 여행지를 알리기 위해 헌신하는 안내자처럼 해당과목을 안내해야 한다. 오늘날 교수에게 부족한 점 중에 하나는 길 잃은 양에게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더 관심을 갖고 찾아 나서야 할 대상은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말이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세 가지가 필요한데, 말이 설득력을 갖추는 데 에토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단언하였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성품 곧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할 때, 한 사람의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사람의 인품 즉 어떤 사람이 말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말하면 우리는 더 많이 더 전적으로 그의 말을 믿는다. 좋은 강의를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와 같은 주장을 강의에 대입하여 새겨 둘 필요가 있다. 곧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강의를 준비하는 겨울방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건대신문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아쉽고 아쉽다 박규리 대학부 기자 미투로 한국 사회의 만연한 성폭력 현장을 고발하고, 여성혐오에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가 활발했던 2018년은 ‘총여학생회 폐지’로 끝맺을 것 같다. 성균관대, 동국대의 총여 폐지안이 가결됐고 연세대는 총여 재개편 수순을 밟고 있다. ‘여성은 더 이상 대학에서 소수자가 아니다’라는 생각과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총여 폐지에 불을 붙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이 살해, 강간, 불법촬영, 데이트폭력을 당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여러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대학가는 이러한 여성 차별과 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차별과 폭력이 계속되는 한 여성은 어떤 공간에서든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2018년의 잇따른 총여 폐지가 아쉽다. 총여의 부재가 계속된 우리대학에서 여성 등 소수자의 정치는 이루어지고 있을까. 에브리타임은 모든 학생의 의견을 대표하는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학생자치기구에 영향력을 피력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하지만 에브리타임에서 ‘여성’ 등 소수자의 자리는 없다. 여성 혐오적 게시물을 흔하게 볼 수 있고, 이곳에서 여성주의적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어렵다. 학생 자치기구인 총학은 어떨까. 이번에 당선된 청심의 선거 공약을 보면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소수자에 대한 공약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인권위원회 정체성 확립’을 통해 인권위의 모호한 정체성을 바로잡는다는 공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고, 성폭력 예방과 대책 등 대학 내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공약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총학이 여성 등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성폭력 문화에 적극적인 대응을 했던 총여의 기능을 과연 제대로 대체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학이 모든 학우들의 대표로서 지켜야 할 중립의 원칙이 대학 내 소수자의 소외를 방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이며 평등인 것일까. 지금도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총여 폐지에 저항하고있다. 대학가의 대대적인 총여 폐지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총여 폐지에 대한 공론화의 기회와 소수자 정치의 중요성은 무시되고 있다. 우리대학에서 이미 사라졌고, 타 대학에서 사라지고 있는 총여 뒤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와 혐오가 자리하고 있다. 박규리 기자 carrot3113@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이어폰 밖 노래 소리에 이어폰을 뺀 적 있다면, 당신은 ABS를 알고 있다 박은혜 ABS 국장 못 뽑고 3년을 묵혀둔, 앓던 이가 있었다. 그렇게나 사람을 괴롭히던 걸 그렇게도 뽑아내지 못했던 건, 그 와중에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아닐까. ‘남’- 왕복 6시간을 통학하던 새내기 시절, 아직은 남이었던 abs였다. 일 년 동안은 아침방송 모니터링으로 아침 8시까지 학교에 와야 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야했고, 하루는 지하철과 수업, 팀플로 밥 먹을 틈도 없었다. 그나마의 공강 시간은 영상 뉴스를 취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며 보냈다. 집에 와 누우면 시곗바늘은 항상 새벽 2시를 넘겨있었다. 힘들다며 울기에도, 쓰러져 잘 수 있는 3시간의 꿀은 너무도 아까웠다. ‘맨날 힘들다면서 왜 안 그만둬’ - 3년 내내 들었던 질문이다. 물론 스스로에게도 수차례 던졌다. 답은 항상 ‘못 그만둬’. 사람 참 간사하게도, 여기서의 기자 생활은 미친듯이 가슴 뛰었다. 기자엔 관심도 없던 내가, ‘많은 건대생’이 공감할 수 있는 뉴스 말고 ‘어떤 건대생’을 위한 뉴스를 만들곤 완전히 달라졌다. 장애 학생 배려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대학의 장애 학생을 위한 시설과 제도는 타 대학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는 것과, 장애 학생들의 고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고 디테일하다는 것을 두 달이 넘는 취재 기간 동안 알아냈다. 기자가 되고 싶어졌다. ‘1분 30초’가 분 바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국장님” - 150cm인 내게 참 안 어울린다. 기껏 한두 살 많은 나는 혼자서 실무진 역할을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무섭게 하면 날 미워할 것 같고, 안 무섭게 하면 날 만만히 볼 것 같고…. 별별 고민을 다 했다. 총 감독, 기획, 총무, 섭외, 대본을 맡았던 마지막 오픈스튜디오 ‘RED’, 방송제 ‘이클립스’가 끝나고, 3년을 살아온 ABS도 끝나감을 알았다. 퇴임식 날, 28명의 후배들이 영상을 만들어줬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을 위한 영상만 만들던 나에게. 그렇게 대견하기도, 밉기도 했던, 동고동락한 철부지들과 이제 방송국에서는 못 본다는 게 찡했다. ‘ABS’ - 유난히도 사람을 들볶았다. ‘이클립스’ 주제처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늘 곁에 있을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잘못됐다고 생각한 선택이 최고의 선택으로 바뀔지는, 내가 그 안에서 얼마나 불살라졌는지에 달려있는 것 같다. 대학생활 4년 중 3년, 여기에 채우길 잘했다. 오래 묵혀뒀던 앓던 이를 뽑자 늘 거기 있던 그게 그리워 자꾸만 혀로 만져본다. 박은혜 ABS 국장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우리대학, 명문사학 반열에 들어서려면 '조직'만을 위한 정책 탈피해야 최의종 편집국장 흔히들 정치인들이 정책을 펼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정치인들이 정책을 펼 때 국민을 위해서라는 가면 속에 자신들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정책들이 참 많다. 국민들의 삶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정책을 펼 때 결국 국민들은 정치인에게 투표로서 심판을 내린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건대신문에 있으면서 느꼈던 것은 대학본부의 정책들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학생들을 위해서’,‘학생들의 진로를 위해서’라는 미사여구가 붙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본부에서 추진하는 정책들 모두가 정말 학생들의 진로에 도움이 됐냐는 질문에는 의문을 남기고 싶다. 올해 시행됐던 학사구조조정의 목적도 ‘4차 산업혁명’,‘융합 교육정책’으로 미래 사회에 적응할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이지만, 이질적인 학과들을 단순히 행정처리만 통합시킨 구조조정은 융합을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학사구조조정 자체가 대학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학생들의 미래를 담보로 무분별하게 개편했다는 지적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본부가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추진했으나 정작 학생들이 불편함을 느꼈던 정책은 최근에도 있었다. 바로 ‘라운지 조성 사업’이다. ‘라운지 조성 사업’을 통해 대학에서는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한다는 큰 목적이 있었으나 그 공사 과정에서 소음 등으로 인해 학생들은 학습권에 침해를 받았다. 본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에는 항상 평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좋은 정책에는 박수를 쳐줄 수 있지만 좋지 않은 정책은 지적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본부가 추진했던 일부 정책의 경우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이름을 내건 ‘조직 우선주의적’ 정책들도 적지 않다. 우리대학의 미래를 위해서라지만, 정책 결정권자들을 위한 정책은 아니었나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대학본부에서는 국내 5대 대학 진입과 세계 100대 대학 진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결코 현 상태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대학이 국내 5대 대학으로 진입하며 세계 100대 대학에 드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부 기관의 평가에 급급해 예산을 써가며 평가를 위한 낭비를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책결정자들이 ‘학생들은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고민을 해야 한다. 필자의 편집국장 역할은 이번 호로 끝이 나지만 단순히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아닌, 우리대학이 스스로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그 부분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려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잘못된 점을 덮고 정책결정자들이 스스로를 속이면 결코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명문사학, 세계가 인정하는 대학이 되기 위해, 현재 명문이라 불리우는 세계 유수의 대학과 비교했을 때 대학본부가 부끄럽지 않는가를 한번 되돌아보기 바란다. 최의종 편집국장 chldmlwhd73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83 Next / 83 GO / 83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