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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 4370, 이제는 우리 역사로서 정립이 필요할 때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19세 나이로 곧 일본으로 유학 갈 마음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소녀의 꿈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한 순간에 가족들의 삶, 인생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국민을 지켜야 할 공권력은 19살 소녀 김선 할머니의 인생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 주민 전체를 70년이 지난 지금도 풀지 못한 한으로 남기게 했다.
부모들 (강요백 화백) |
김선 할머니 가족의 끝나지 않는 한
19살 소녀 김선 가족은 ‘초토화작전’으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산으로 피신했다. 몸이 아파 빠르게 갈 수 없었던 소녀 김선의 어머니는 무장 경찰들에게 잡혀 죽창으로 여러 번 찔려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산으로 피신했다. 피신을 했지만 결국 사로잡힌 아버지와 오빠들은 제주도 곳곳으로 끌려갔고, 제주공항 근처에서 사살당한 오빠를 비롯해 남자인 가족들은 7살 차이가 나는 조카를 제외하고 처형당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소녀의 올케도 하늘이 무심하게 총살당하고 소녀 김선은 조카와 함께 겨와 지푸라기를 먹으며 연명했다. 무장경찰들은 잔혹하게 제주도민들을 유린했다. 성노리개를 비롯해 각종 노동 착취를 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4·3 당시 무장경찰과 군인, 서북청년단은 그 때 그 장소에 있던 모두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보냈다.
소녀 김선은 무장경찰과 결혼한 단짝친구의 주선으로 그 무장경찰의 동생이던 현은선씨의 아버지를 만났다. 일가를 몰살 시킨 무장경찰 집안과 결혼한 김선의 결혼 생활은 불운했다. 부부싸움을 할 때면 폭도의 딸이라는 말을 듣는 소녀 김선. 그런 말을 뱉으면서도 무장경찰의 집안이라는 멍에 때문에 마음 속 깊은 한쪽이 편하지 못했던 현은 선씨의 아버지. 당시 공권력은 4·3 이후에도, 이 부부를 끝까지 괴롭게 했다.
현은선씨는 어릴 적 제주로 갔던 시절을 회상한다. 제주에 갔던 현은선씨는 몰래 이불을 둘러쓰고 펑펑 울며 뒹굴었던 어머니 김선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89세 할머니가 돼버린 소녀 김선은 이제는 더 이상 그 때의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다. 인간으로서 가치조차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김선 할머니. 4·3 당시 위정세력은 정권 유지를 위해 무고한 민간인의 인권 가치까지 떨어뜨렸다.
2006년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한 김선 할머니 (현재 89세)와 조카 김태희 할아버지(현재 82세) |
‘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의 의미
‘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은 그 역사가 길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분위기에 제주4·3항쟁에 대한 증언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특별위원회’가 설립됐다. 2000년 1월에는 ‘제주4·3사건 특별법’이 통과됐다. 하지만 당시 ‘제주4·3사건 특별법’은 완전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4·3정립 문제에 미비하다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끊임없이 제기됐던 특별법 개정 논의는 70주년이 되는 올해 활발히 이뤄졌다.
제주4·3평화재단 이지훈 사무처장은 특별법 개정 근거를 △진상조사법에서 보상 조항 포함 △제주4·3중앙위원회 조사권 강화 △두 차례의 군사재판 무효화 필요성으로 제기했다. 특별법이피해보상법으로 개정되면 유족에 대한 배·보상이 가능해지고,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과 트라우마 치유와 관련된 지원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 처장은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명예회복과 배·보상은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밝혔다.
김선 할머니처럼 차마 그 삶이 고단해 다시는 그 때의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은 피해자들도 있지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 2월 5일4·3으로 억울하게 수형을 한 18명에 대한 재심 개시를 따지는 심문기일이 제주지법에서 열렸다. 재판이라고도 볼 수 없는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아 복역한 김평국 할아버지(88)를 비롯한 18명은 마지막 명예 회복의 기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특별법 개정과 법원의 무죄 판결이 70년 세월을 한 번에 씻을 수는 없지만 저승에서 부모님을 뵐 때 죄송하지 않을 수 있게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4·3, 우리에게 어떤 것일까
JTBC ‘효리네민박’으로 회자되고 있는 이효리씨가 제주4·3추모식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하지만 추모식 전 ‘제주4·3유가족’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이 이효리씨의 공식 팬카페에 이효리씨의 추모식 참석을 정중히 거절한 일이 있었다. 유족들 가운데 진중하고 가슴 아픈 의미를 갖고 있는 4·3이 자칫 가볍고 단편적인 사건으로 변모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족들뿐만 아니라 네티즌 사이에서도 이효리씨의 추모식 참석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제주도청에서 ‘신중히 결정한 것’이라고 표명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제주4·3추모식에서 이효리씨는 내레이션을 맡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4·3으로 부모님을 잃고 70년 동안 힘든 세월을 겪은 김선 할머니의 딸 현은선씨는 양측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현은선씨는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분들은 그 참혹한 현장의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우려를 하고는 합니다”며 유가족들의 입장을 존중의 의견을 드러냈다. 이어 현씨는 “하지만 2세를 넘어 3세대, 그리고 우리 사회에 중심이 될 젊은 세대들이 4·3의 의미를 정립하고 70주년을 넘어 80, 90, 100주년 이상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하려면 다양한 접근과 방식이 필요하다”며 “4·3의 지속적인 관심을 위한 방법을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 고 말했다.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추모식에 참여한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사를 하고 있다 |
제주4·3평화재단 이지훈 사무처장은 희생자 유족회와 제주 재향경우회(퇴직 경찰관 모임)가 양분됐던 4·3위령제를 합동위령제로 치르게 된 과정을 언급하며 ‘화해와 상생’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어 이 사무처장은 “4·3은 극단적인 이념대립 산실이 아닌 인권 문제이고, 세계에 알릴 가슴 아팠던 냉전의 일부”라고 밝히며 “제주도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에서, 전 국민 모두 하나가 돼 4·3을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주4·3이란?
1947년 3월 1일 열린 삼일절 제주도 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한 것을 기점으로 1954년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공권력에 의해서 제주도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1일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3만 여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모여 3·1절 기념대회를 열었다. 3·1 대회 행사 이후 일어난 시위 도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에게 미군정 경찰들이 발포한다. 하지만 경찰은 발포자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은 없이 3.1절 집회 주도자와 시위자 검거에 나섰다.
이어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과 제주도 주민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면서 4·3이 일어났다. 당시 봉기는 전력 부족으로 게릴라 형식이었으며 경찰이나 군과 비교하면 계란에 바위치기 수준이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해안선 5km이상 지역은 적성지역으로 통칭됐고, 통행을 금지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됐다. 이듬해 봄까지 지속된 초토화 작전으로 희생자는 3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도 예비검속과 연좌제로 주민들은 탄압받았으며 1954년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4·3이 끝나게 된다.
최의종 기자 chldmlwhd731@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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