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미디어 교내 건대신문,학원방송국,영자신문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글에 대해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전체 건대신문 672 KU ABS 55 KU 영자신문 1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건대신문 [사회]처절한 싸움 끝에 얻어낸 핏빛 훈장 -독립투사 몽양 여운형을 회고하다 때는 73년 전 8월 15일, 전국은 태극기 물결로 휩싸였고 국민은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독립. 이 한 마디를 위해 수많은 독립투사는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했지만, 현재 이들 중 대다수가 역사 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광복 73주년을 맞아 우리 기억 속에 잊힌 민족 지도자, 몽양 여운형을 알기 위해 몽양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회장(前 국회의원)을 만나 봤다. 몽양 여운형 선생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사진제공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독립운동의 시발점, 몽양의 결단 몽양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건 1917년 상하이에서였다. 주요 업적인 신한청년당 또 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됐는데, 이부영 회장은 “어느 민족이든지 임시정부나 정당이 있어야 독립청원이 가능하기에 몽양 주도 아래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당을 만들었고, 당시 청년터키당을 벤치마킹했다”라고 밝혔다. 민족 항거 대표운동인 3·1운동 또한 그와 관련 됐다. 1919년 당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한반도 내 붉어진 3·1운동을 자치운동으로 무마시키려고 계획했다. 이에 그들은 민족 지도자인 몽양에게 일본에 입국하라고 제의했다. 당시 대다수가 일본의 꾐이라며 말렸지만, 그는 굳은 신념을 갖고 호랑이 굴을 향해 스스로 걸어갔다. 이후 제국호텔 내 일본 고위 관료들 앞에서 자치제 제안의 반박과 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함으로써 당혹감과 함께 큰 감동을 줬다. 활발히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중 상해에서 체포돼 수년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는데, 이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을 맡게 된다. 익히 아는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이 바로 몽양이 추진한 것이다. 1947년 3월 폭탄테러로 파손된 몽양 계동 자택 몽양이 만들고자 한 진정한 광복 일제강점기 말, 일찍이 일제의 패전을 예상한 몽양은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이부영 회장은 “일본인들도 보복폭력을 우려해 몽양에게 자신들이 안전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라며 “이에 그는 정치범으로 갇힌 이를 모두 석방하고, 3개월 동안 국민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두는 등 200가지의 경제 조치를 약속해달라고 협상했다”라고 덧붙였다. 이로써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해있던 독립투사들이 해방됐으며 잇따라 타 감옥 내 수용됐던 수많은 애국지사가 풀려나게 됐다. 1945년 8월 15일, 꿈꾸던 광복을 맞이한 몽양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이듬해 2월 북한을 방문하여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했지만,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이 회장은 이와 관련해 “몽양은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좌우합작운동을 실행했지만, 우파들은 기득권 보호를 위해 반대하고 좌파에선 몽양과 경쟁하던 좌익 친일파들에 의해 반대당했다”라며 “몽양은 좌우익 둘 다에 의한 12번의 테러 끝에 서거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부영 회장에게 현대 몽양의 좌우합작운동이란? 좌우합작운동은 앞서 말했듯 광복 이후 혼란을 겪던 시절 몽양이 강력히 추진한 단일 정부 수립 반대 운동이다. 이부영 회장은 이를 현대 사회 내 협치라고 정의했다. 이 회장은 며칠 전 대통령과 5당 대표가 모인 간담회를 그 예로 들었다. 우익인 자유한국당이 비핵화를 전제로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변화이자 협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야가 완벽한 의견수렴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당 정책에 있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금의 방향이라도 틀 수 있다면 그것은 협치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몽양 여운형 선생을 부르는 말 중 빨갱이와 회색분자라는 표현이 있다”라며 운을 뗀 뒤, 몽양은 투철히 항일 운동한 독립투사며 미국은 나치스와 일본을 폐망시킨 최강대국이었음을 전제했다. 소련 또한 같기에 당시 그들에 대한 반발은 비현실적이었고, 몽양의 주장은 美·蘇 협력 속에 통일 정부를 세운 뒤 3년 안에 완전한 독립을 이뤄내는 데 의의가 있음을 알렸다. 또한 “이처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에도 결국 한국 전쟁이라는 최악의 결과와 큰 피해를 가져왔다”라며 “몽양의 당시 모습은 기회주의자이자 회색분자가 아닌, 민족 애국지사로 재평가가 필요하다”라고 피력했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들과 몽양이 바라보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 이부영 회장은 “몽양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바라본다면 6.25 전쟁과 사회 양극화가 심해져서 가슴 아파하겠지만, 때로는 사회통합과 민주 정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했던 일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에 자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현대 사회 내 美·中 관계처럼 여러 긴장 상태가 벌어진다곤 하지만, 이는 구냉전 같이 이념대결이 아니기에 그 경계가 확실치 않음을 강조했다. 이에 세력균형이 생길 수 있으며 남한 내 대표적 예시가 촛불시위라고 밝혔다. 군대가 함부로 동원될 수 없기에 체포 및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국민 희생 없이 탄핵이 인정되고 권력을 바꿀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경우, 핵을 완성해 초강대국인 미국의 일방적 주도권을 뺏고 오히려 협상장으로 끌고 온 것을 예로 들었다. 추가로 이 회장은 “남북한 現 지도자 두 명이 남북주민의 생명 보장에 있어 마음이 맞기에 평창올림픽 북한 참여, 남북정상회담 등의 성과를 낼 수 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現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긍정적 의견도 제기했는데, 이 회장은 “한반도 비핵화는 필수적이며 몽양도 이에 대해 찬성할 것”이라며 “美·中·韓 세 나라의 이해관계 또한 북한의 비핵화에는 이견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남북 대결이 유지되는 지금 무력은 평화를 얻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무력을 이용해 평화를 얻고 점차 줄여나가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며 “이것이 아마 몽양이 현재 가장 바라는 것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1945년 해방 후 서울 YMCA에서 열린 건국동맹 회의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회장님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 전직 정치인이다. 1974년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10월 유신에 맞서 언론 자유를 수호하자는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발표했다가 이듬해 해직됐고, 긴급조치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영화 1987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 당의장으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지난 2015년 2월 11일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현재는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상구 기자 shufsdhd@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기획] 건대생을 위한 21세기 스마트한 학교생활 -우리 대학 학우라면 알아둬야 할 어플리케이션과 홈페이지 새내기 호를 맞아 건국대학교 학우들이 학교생활 중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어플리케이션과 홈페이지를 알아봤습니다. 김민영 기자 mymarcia1110@konkuk.ac.kr http://popkon.konkuk.ac.kr/news/articleView.html?idxno=12001 건대신문 [학술]최재헌 교수의 세계유산이야기 - ⑥ 세계유산과 유산 해석을 둘러싼 갈등 취재헌 교수(지리학과·대학원 세계유산학과) 올해 열리는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6월 말부터 열리게 된다. 현재 세계유산이 1092개이니만큼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100번째 세계유산이 탄생할 것이다. 그 사이 자국의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각국의 외교전도 치열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한국은 유교 학당서원이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아 이번만큼은 느긋하게 위원회를 지켜볼 수 있을 듯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와 보존 관리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여야 한다. 현재의 심사절차를 보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인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와 IUCN(세계자연보존연맹)에서 각각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심의하고, 그 결과인 권고안을 등재, 보류, 반려, 등재 불가로 나누어 21개 이사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함으로써 최종적인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등재과정에서 자문기구의 권고안을 따르기보다는 정치적 외교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등재를 결정하는 ‘등재의 정치화 현상’이 지속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즉, 전문가들의 견해보다는 비전문가인 외교관들에 의해 패거리 짖기와 편 가르기에 의해 등재가 결정되는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에 가보면 아랍과 중동국가군, 스페인어 사용 국가군, 아프리카 국가군 등의 서로 친밀한 국가들이 한패가 되어 서로 밀어주기를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최근 열린 세계유산위원회를 지켜보면 유네스코에서 탈퇴한 미국과 이스라엘은 문화유산 분야에서는 주류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다. 또한, 미국 탈퇴 이후에 유네스코에 지원금을 많이 부담하는 일본과 중국의 입김과 발언권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현재까지 자문기구가 등재로 권고한 유산이 등재 불가가 되는 예는 없지만, ‘등재 불가’로 권고한 유산이 ‘보류’나 ‘반려’로 상향조정 되거나 권고안이 뒤집히는 일이 다반사이다. ICOMOS 세계유산패널 심사에서 전문가들의 장고와 토론을 거쳐 내려진 권고안이 단 몇 분의 외교적 수사로 무시되고 뒤집히는 것을 보면 세계유산 제도에 대한 신뢰감마저 흔드는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또 다른 문제는 세계유산의 해석에 있어서 일부 역사를 왜곡하거나 고의로 무시하는 일이다. 세계유산은 인류의 문화유산을 지속 가능하게 보존하며 현재의 가치를 미래 세대에게 올바르게 전승하는 것이므로, 유산의 가치에 내재한 전체 역사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하다. 일본은 자국의 메이지 산업유산을 등재하면서 한국인이 강제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국제사회의 동조 때문에, 2015년 독일 본에서 일본의 메이지 산업유산에서 일어난 조선인의 강제노동을 인정하고 유산 해석에 반영한 이행보고서 제출을 세계인 앞에 약속하였지만, 아직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유산/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왜 일본은 강제동원 유산이나 남경대학살, 731부대 등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저질렀던 잔혹한 역사적 사실을 숨기기에만 급급할까? 해외에서 만난 어떤 일본 학자가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말하는 것을 보았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그에게 원폭 투하는 오키나와 공방전에서 양측의 피해가 수만 명에 이르자 인명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던 경험이 있다. 만일 일본이 미래 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일본의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면, 역사의 명암을 함께 돌아보고 미래 세대에서 제대로 가르칠 수 있어야지 비로소 역사의 진실을 알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유산의 해석을 둘러싼 국제 간의 갈등이 꼭 한·일간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주의 유산에 대하여 과거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와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국가 사이에 극명하게 해석이 갈리는 일을 종종 보게 된다. 식민 지배자의 시각에서는 철도의 도입이 근대화의 도입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지만, 식민지배를 받은 자에게는 자원의 수탈이자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전쟁 유산 등도 유산 해석을 둘러싼 갈등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치열한 전장이었던 벨기에 솜강 전투지구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를 둘러싸고 세계유산위원회는 해석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쟁유산은 될 수 있는 대로 등재하지 않기로 결정 한 바있다. 이와 함께 유산 해석을 둘러싼 갈등 소지가 있는 경우에는 잠정목록 등재신청 이전에 이해당사자 간에 이견이 없도록 조정과 합의를 권고하고 있다. 이해당사자에 따라 유산 해석에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갈등유산(conflict heritage)에 대하여 세계유산 전문가 사이에 국제적인 합의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호주 이코모스에서 만든 버라헌장(Burra Charter)이라고 할 수 있다. 버라헌장에서는 유산뿐 아니라 유산이 있는 장소(place)의 문화적 중요성(cultural significance)을 유지하고 유산에 관계된 모든 역사를 유산 가치에 포함하여 해석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세계유산은 단순한 유산이 아니라 각 국가의 문화 외교가 벌어지는 대상이면서 국제적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자국만의 이익보다는 이해관계를 떠나 타인을 배려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문화 역량과 신뢰성을 갖춘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 유산위원회/출처 유네스코 세계에서 다른 나라의 지원과 도움을 받던 나라가 오히려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공여국이 된 사례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국이 세계의 어려운 국가 에게 물질적인 지원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문화 역량과 도덕성을 갖춘 존경받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 나아가 한국의 세계유산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세계인으로 우뚝 설 수 있어야 한다. 타국의 문화유산을 비하하는 발언이나 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각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성숙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가짐과 올바른 역사 인식은 우리 젊은이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이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아시아의 세계유산 해석을 둘러싼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는 바탕이 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최재헌 교수(지리학과·대학원 세계유산학과)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새 메뉴 개발 · 최저임금 상승·식자재값 상승 등 이유로 인상추진 사진 김예신 기자 우리대학 학식 위탁업체인 ‘아워홈(교직원식당, 기숙사식당, 도서관 지하식당, 학생회관 지하식당)’과 ‘신세계푸드(학생회관 1층식당)’는 최근 총무처에 학식단가 인상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학생 기호 반영 메뉴개발 △최저임금 상승 △식자재 가격상승이 그 근거다. 한편 ‘신세계푸드’는 방학 중 학식 단가를 올렸다가 총무처의 제재로 다시 내린 바 있다. 대학교육혁신원 교육성과관리센터가 실시한 우리대학 ‘학생만족실태조사’에서 따르면 학식 음식 가격과 맛에 대한 학우들의 만족도가 저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가격 △맛 △청결성 △직원 친절도 항목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평균점수에서 2016년과 2017년각 5점 만점을 기준으로 3.60과 3.98로높은 편이다. 그러나 세부항목으로 보자면 가격 항목에선 3.09와 3.40 맛 항목에선 각 2.75와 3.06으로 평균에 크게 못 미쳤다. 또한 청결성과 직원 친절도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평균이 높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학생만족실태조사에서 맛과 가격에서 낮은 수치를 받은만큼 학식 단가 인상에 대한 학생 여론도 회의적이다. 정현종(사과대·정치17)학우는 학식을 이용하는 이유로 가격을 꼽으며 “단가를 인상하면 더 이상 이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허윤아(이과대·물리15)학우 또한 “현재 가격 보다 인상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학교 주변 식당을 이용하겠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편 접근성을 이유로 이용은 하겠지만 만족도가 떨어질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임승환(경영대·경영17)학우는 “가격 변동 이후에도 학생식당을 이용하겠지만 만족도는 지금만 못 할 것 같다”고 밝혔다. 김유진(KIT·의생공15) 총학생회장은 “학식가격 인상이 학우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며 학식 가격 인상 추진에 대해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총학생회장은 “총무처와 협의 중 가격 상승이 수요저하로 이어져 매출에 악영향이 갈 수 있음을 주장 할 예정”이라고 말하며 “학식쿠폰을 비롯한 학생의 금전적 부담을 덜 수 있는 혜택 강화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예신 기자 yesin9797@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우리는 왜 대학에 왔는가 - 대2병 환자편(4/4) 이번 학기 동안 연재될 <우리는 왜 대학에 왔는가>는 학우들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대학에 다니는지 알고자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대학생들의 삶을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봤다.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당신은 왜 대학에 왔는가? ‘대2병’에 걸린 철학과 학우를 만나다 캠퍼스에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환자들의 병명은 대학교 2학년만 되면 찾아온다는 이른바 ‘대2병'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며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느낀다. 몇몇은 ‘대2병’을 앓은 후 전과나 휴학을 하거나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따뜻한 5월의 어느날 <건대신문>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 휴학생을 만났다. 심재호(문과대·철학2휴) 학우는 “글을 쓸 생각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도 나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의 도입부를 썼다 지웠다 할뿐 글에 별 진전이 없는 요즘이다. 그의 일상은 종일 누워 있다가 심심해지면 밖에 나가서 길거리 포교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몹시 권태롭다. 그는 사람이 숨만 붙이고 사는 데엔 그다지 많은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 중이다. 하지만 ‘숨만 붙이면서 사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일까’하며 그는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휴학을 하고 나니까 제가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이것저것 불만을 많이 갖고 있지만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욕만 하면서 다를 바 없이 흘러가고 있죠. 제 삶만 변하고 있어요. 점점 더 소외되는 방향으로.” “우리는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대학에 왔다” 그는 “원래 대학에 올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학창시절 그는 사춘기와 겹치면서 처음 학교의 교육 체제를 비딱하게 보는 시선을 갖게 됐다. 그는 수업시간에 다른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혼내는 교사와 말싸움을 한 후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처럼 다뤄지기도 했다. 또 그는 혼자 한미FTA 반대 집회에 나갔다 받은 피켓을 친구들에게 보여준 일이 선생님 귀에 들려가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간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반항심을 갖고 했던 것들이 제가 남들보다 문제의식이 있어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면 무언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믿었죠. 그때가 제가 스스로 책을 찾아보고 글을 쓰며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때였어요.” 그가 철학을 전공하게 되는데 영향은 끼친 사람도 다름 아닌, 저자와 독자로서 만난 ‘이한 변호사’다. 그는 이한 변호사를 “급진적인 소리를 논리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라 평한다. 학력 폐지 제도나 기본소득 제도와 같은 과감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이 변호사의 글을 읽으며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부하려고 대학에 가겠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합리화였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갓 성인이 될 사람이 대학 말고 갈 수 있는 곳이 있냐는 얘기다. “졸업장의 가치는 시민권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졸업장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데 최저 기준처럼 이야기돼요. 대학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을 때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다녀야만 하는 곳인 거예요.” 작가로서 사랑받으며 살고 싶어 살면서 생생히 기억에 남으며 스스로 살아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학창시절 학급 홈페이지에 재미로 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의 소설은 반 친구들이 돌려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학년이 끝날 즘엔 그의 소설을 각색한 대본으로 연극무대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사소하지만 그가 스스로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순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그는 글을 쓰면서 살기로 결심했다. ‘거의 하루 하나 꼴로 글을 써대던 예전의 기억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내적갈등을 되풀이해대고 나서야 얻어낸 그의 결론인 것이다. 읽는 것은 그리 즐기지 않으며 자신이 글 자체를 썩 좋아하는 편인지도 분명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글쓰는 일만은 무척이나 즐겁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소설계 시장이 양분돼있다”고 주장한다. 순수문학 쪽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문단이란 이름으로 벽에 갖혀 있는 반면, 웹소설은 잘 팔리긴 하지만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하는 식으로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간 단계의 문학이 필요하며 ‘정유정 작가’와 같이 그러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랑받으며 살고 싶다”고 답했다. 자발적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서 살아가는 요즘, 그가 제일 무서운 것은 앞으로 계속 방구석에 박혀서 은둔자처럼 살게 될까 하는 걱정이라고 말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휴학 중이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제 개인적인 인간성이나 삶의 태도 때문에 생기는 문제 같기도 해요.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적 불이익을 잔뜩 떠 앉고 살아야 하는 세상은 불공정한 것 같아요.” 유동화 기자 donghwa42@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우리는 왜 대학에 왔는가-화석편(2/4) 사진 이용우 기자 이번 학기 동안 연재될 <우리는 왜 대학에 왔는가>는 학우들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대학에 다니는지 알고자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대학생들의 삶을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봤다.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당신은 왜 대학에 왔는가? 학교를 13년째 다니는 수의대 ‘화석’ 학우를 만나다 김무석(수의대‧수의4) 학우는 2004년, 21살에 입학해 현재 13년째 대학을 다니고 있다. 왜 이렇게 학교를 오래 다니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빨리 졸업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동물이 좋아서 수의대에 왔었지만 졸업하고도 수의사로 살아갈 계획은 없어요. 전과를 할까 고민해본 적은 있지만, 어느 학과를 가든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충분히 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는 지금 복학해서 수의대 본과 4학년이지만 추가로 휴학을 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 시절은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입학 후 수의대 학생회, ‘다함께’라는 사회단체, 동아리연합회 회장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최근 그는 건국대 시국회의의 대표로 활동하며 ‘박근혜 퇴진 운동과 적폐청산-무엇을 바꿀 것인가?’라는 시리즈 강연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입학하기 전까지 사회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회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후 우연히 참여했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반전 시위는 그로 하여금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갖게 했다. “최근 몇 년 전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로 충격을 많이 받았잖아요. 저는 먼 나라의 이야기인 이라크 전쟁이 그렇게 느껴졌었어요.” 사회의 우선순위를 거슬러 살고 싶어 졸업을 하고 취업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련의 일들은 많은 사람들의 목표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는 2013년에 병역거부를 하고 1년 2개월 간 감옥에서 살았다. “꼭 병역거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어요.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결론은 전 회사에 취업을 하는 것보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계속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감옥 안에서는 공부를 할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았죠.” 그는 진지한 표정과 맑은 눈망울을 띄고 말했다. 감옥에서의 이야기를 묻자 그는 인천 구치소에 있을 당시 다른 옥수들은 양심수인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고 말했다. 다른 옥수들이 <한겨레 신문>을 구독해 읽거나,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과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집회 참석할 때 보상을 받았냐’며 구박하기도 했다. “남부 교도소에선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과 함께 출역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저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저는 그 사람들에게 노동자 이야길 하면서 함께 사이좋게 지냈죠.” 그는 사회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이라크 전쟁이나 세월호 참사 등의 인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명보다 이윤을 제일 중시했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는 권력자들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삶의 목표다. 그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를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스스로를 무기력하다고 느끼지 않아서 좋다고 말한다. 또한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자신이 하는 일이 이 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을 때면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해요.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사는 게 사는 것이에요. 우리는 적자생존인 동물의 세계완 다르게 차별이나 억압에 반대해야 해요.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유동화 기자 donghwa42@konkuk.ac.kr 건대신문 [취재수첩]대학언론의 수직적 조직 문화 최근 대학언론의 선후배간 수직적 조직 문화가 화두에 오르고 있다. 예부터 조직은 원활한 운영과 선후배간 교육의 목적을 위해 수직적 구조를 택해왔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수직적 관계는 필요하다.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진심어린 조언을 해줄 수도 있고 해당 업무에 대해 지식이 풍부하다면 업무에 대한 교육도 철저히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후배간 소통이 반드시 수직적 문화여야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이제는 조직 내의 수직적 문화에 대해 다시 곱씹어봐야 할 때다. 최근 우리 대학 학원방송국 ABS에서 63기 국원들이 대거 퇴국 의사를 밝히며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 내용에 따르면 오랫동안 선후배간 관계가 좋지 않았고 와중에 최근 불화가 심화돼 대거 퇴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대자보에 참여한 퇴국한 A 국원에 따르면 조직 내에서 불만을 표출해도 수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자보 내용이 학우들 사이에 퍼지자 일각에서는 수직적문화가 언론과 방송계의 전통이며 고질적인 문제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수직적인 구조의 탓이라고 돌릴 수 없다. 어느 조직이든 수직적 상하관계는 필요하지만 이는 핑계가 될 수 없다. 수직적 조직이 옛날부터 굳어져서 내려온 전통이긴 하나 전통을 답습하고 순응하는 것은 현재 조직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수직적 구조와 상하관계가 없더라도 조직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원 간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가 지켜지기 위해선 수직적, 상하관계의 ‘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하’의 위치에 있는 사람보다 더욱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직의 일원으로 일했던 기자의 경험을 비춰보면 사람은 본인의 의지만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무력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이는 상하관계와 수직적 조직에 몸 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본 경험일 것이다. 의지만으로 이미 정해진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에게는 너무 힘들다. 물론, 기자 역시 아직 완벽한 사회인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언론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번 ABS방송국 사건을 지켜보며 무엇보다 오랫동안 같이 동고동락한 선후배 간에 불화가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대학언론은 자정능력을 키워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내에 고착화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편으로 이런 수직적 조직 문화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지 기자도 자신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 박가은 부편집국장 qkrrkdms924@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칼럼]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1인 미디어 가동민 편집국장 최근 ‘유튜브’,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개인 방송 시청이 늘어나면서 1인 미디어와 개인 방송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1인 미디어를 시청하고 있고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으로 크리에이터가 1위를 차지할 만큼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1인 미디어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이 활성화가 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대중화가 되면서 1인 미디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1인 미디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1인 미디어의 장점을 잘 살려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크리에이터 같은 경우 기존의 미디어들과 달리 양방향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어 시청자들이 직접 방송에 참여하는 느낌을 준다. 1인 미디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1인 미디어를 시청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나 임산부 등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할 때 먹방(먹는 방송)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출퇴근, 등하교 할 때 1인 미디어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꽤 많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크리에이터가 있는 만큼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요리, 여행, 공부 등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영상을 보며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다. 1인 미디어는 많은 장점과 함께 뚜렷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1인 미디어 특성상 촬영 장비만 있다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다. 그래서 의도를 갖고 가짜뉴스를 제작해 퍼트리기도 하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조회수와 추천수를 늘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자극적인 방송을 남녀노소 누구나 시청할 수 있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을 청소년을 비롯해 어린 아이들도 쉽게 접할 수 있어 문제가 된다. 저작권과 초상권 문제도 심각하다. 무심코 사용하는 음악이나 사진이 저작권 위반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요즘에는 길거리에 나가 방송을 진행하는 크리에이터들도 있다 보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얼굴이 생방송으로 송출돼 신상 정보가 노출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해당 크리에이터와 일반인이 마찰이 일어나는 일이 허다하다. 1인 미디어는 현재 우리 생활에서 크게 자리 잡고 있다. 1인 미디어가 새로운 문화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문제점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규제할 부분은 규제하고 활성화할 부분은 활성화시켜 올바른 미디어가 된다면 우리나라 전반적인 산업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가동민 편집국장 syg10015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보도] 상허도서관 문화행사 '책과 함께' 우리대학 상허기념도서관은 지난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2017 상허기념도서관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해 학생과 소통하는 도서관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취지다. 이번 3일 동안 진행된 행사 프로그램에는 △최다 대출상 △Free Trading △주호민 작가와의 만남 △커피향 가득한 도서관 △스테디셀러 전시 및 도서 할인판매 △Stamp Tour △대출자 깜짝이벤트 등이 있었다. 주호민 작가와의 만남에서 주 작가는 ‘상상력은 어떻게 만화가 되는가?’를 주제로 본인의 만화가가 된 과정과 ‘신과 함께’, ‘무한동력’ 등 대표작들의 탄생배경에 대해 강연했다. 문화행사 마지막 날인 27일, 상허기념도서관은 학생들의 도서관 이용 활성화와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올 한해 가장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학생 13명을 선정해 '최다대출상'을 시상했다. 지난 3월부터 11월 23일까지 상허기념도서관과 법학전문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책을 대출한 ‘독서왕’으로 총 166권을 대출한 김동완(경영대·경영4) 학우가 선정됐다. 심용희 상허기념도서관장은 “책을 가까이 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에 도서관 문화행사를 통해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다경 기자 lid041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건대신문 [시사]풀리지 않은 19세 소녀의 限 제주4·3 70주년 : 4370, 이제는 우리 역사로서 정립이 필요할 때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19세 나이로 곧 일본으로 유학 갈 마음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소녀의 꿈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한 순간에 가족들의 삶, 인생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국민을 지켜야 할 공권력은 19살 소녀 김선 할머니의 인생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 주민 전체를 70년이 지난 지금도 풀지 못한 한으로 남기게 했다. 부모들 (강요백 화백) 김선 할머니 가족의 끝나지 않는 한 19살 소녀 김선 가족은 ‘초토화작전’으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산으로 피신했다. 몸이 아파 빠르게 갈 수 없었던 소녀 김선의 어머니는 무장 경찰들에게 잡혀 죽창으로 여러 번 찔려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산으로 피신했다. 피신을 했지만 결국 사로잡힌 아버지와 오빠들은 제주도 곳곳으로 끌려갔고, 제주공항 근처에서 사살당한 오빠를 비롯해 남자인 가족들은 7살 차이가 나는 조카를 제외하고 처형당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소녀의 올케도 하늘이 무심하게 총살당하고 소녀 김선은 조카와 함께 겨와 지푸라기를 먹으며 연명했다. 무장경찰들은 잔혹하게 제주도민들을 유린했다. 성노리개를 비롯해 각종 노동 착취를 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4·3 당시 무장경찰과 군인, 서북청년단은 그 때 그 장소에 있던 모두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보냈다. 소녀 김선은 무장경찰과 결혼한 단짝친구의 주선으로 그 무장경찰의 동생이던 현은선씨의 아버지를 만났다. 일가를 몰살 시킨 무장경찰 집안과 결혼한 김선의 결혼 생활은 불운했다. 부부싸움을 할 때면 폭도의 딸이라는 말을 듣는 소녀 김선. 그런 말을 뱉으면서도 무장경찰의 집안이라는 멍에 때문에 마음 속 깊은 한쪽이 편하지 못했던 현은 선씨의 아버지. 당시 공권력은 4·3 이후에도, 이 부부를 끝까지 괴롭게 했다. 현은선씨는 어릴 적 제주로 갔던 시절을 회상한다. 제주에 갔던 현은선씨는 몰래 이불을 둘러쓰고 펑펑 울며 뒹굴었던 어머니 김선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89세 할머니가 돼버린 소녀 김선은 이제는 더 이상 그 때의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다. 인간으로서 가치조차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김선 할머니. 4·3 당시 위정세력은 정권 유지를 위해 무고한 민간인의 인권 가치까지 떨어뜨렸다. 2006년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한 김선 할머니 (현재 89세)와 조카 김태희 할아버지(현재 82세) ‘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의 의미 ‘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은 그 역사가 길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분위기에 제주4·3항쟁에 대한 증언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특별위원회’가 설립됐다. 2000년 1월에는 ‘제주4·3사건 특별법’이 통과됐다. 하지만 당시 ‘제주4·3사건 특별법’은 완전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4·3정립 문제에 미비하다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끊임없이 제기됐던 특별법 개정 논의는 70주년이 되는 올해 활발히 이뤄졌다. 제주4·3평화재단 이지훈 사무처장은 특별법 개정 근거를 △진상조사법에서 보상 조항 포함 △제주4·3중앙위원회 조사권 강화 △두 차례의 군사재판 무효화 필요성으로 제기했다. 특별법이피해보상법으로 개정되면 유족에 대한 배·보상이 가능해지고,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과 트라우마 치유와 관련된 지원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 처장은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명예회복과 배·보상은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밝혔다. 김선 할머니처럼 차마 그 삶이 고단해 다시는 그 때의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은 피해자들도 있지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 2월 5일4·3으로 억울하게 수형을 한 18명에 대한 재심 개시를 따지는 심문기일이 제주지법에서 열렸다. 재판이라고도 볼 수 없는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아 복역한 김평국 할아버지(88)를 비롯한 18명은 마지막 명예 회복의 기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특별법 개정과 법원의 무죄 판결이 70년 세월을 한 번에 씻을 수는 없지만 저승에서 부모님을 뵐 때 죄송하지 않을 수 있게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4·3, 우리에게 어떤 것일까 JTBC ‘효리네민박’으로 회자되고 있는 이효리씨가 제주4·3추모식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하지만 추모식 전 ‘제주4·3유가족’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이 이효리씨의 공식 팬카페에 이효리씨의 추모식 참석을 정중히 거절한 일이 있었다. 유족들 가운데 진중하고 가슴 아픈 의미를 갖고 있는 4·3이 자칫 가볍고 단편적인 사건으로 변모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족들뿐만 아니라 네티즌 사이에서도 이효리씨의 추모식 참석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제주도청에서 ‘신중히 결정한 것’이라고 표명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제주4·3추모식에서 이효리씨는 내레이션을 맡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4·3으로 부모님을 잃고 70년 동안 힘든 세월을 겪은 김선 할머니의 딸 현은선씨는 양측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현은선씨는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분들은 그 참혹한 현장의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우려를 하고는 합니다”며 유가족들의 입장을 존중의 의견을 드러냈다. 이어 현씨는 “하지만 2세를 넘어 3세대, 그리고 우리 사회에 중심이 될 젊은 세대들이 4·3의 의미를 정립하고 70주년을 넘어 80, 90, 100주년 이상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하려면 다양한 접근과 방식이 필요하다”며 “4·3의 지속적인 관심을 위한 방법을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 고 말했다.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추모식에 참여한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사를 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이지훈 사무처장은 희생자 유족회와 제주 재향경우회(퇴직 경찰관 모임)가 양분됐던 4·3위령제를 합동위령제로 치르게 된 과정을 언급하며 ‘화해와 상생’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어 이 사무처장은 “4·3은 극단적인 이념대립 산실이 아닌 인권 문제이고, 세계에 알릴 가슴 아팠던 냉전의 일부”라고 밝히며 “제주도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에서, 전 국민 모두 하나가 돼 4·3을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주4·3이란? 1947년 3월 1일 열린 삼일절 제주도 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한 것을 기점으로 1954년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공권력에 의해서 제주도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1일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3만 여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모여 3·1절 기념대회를 열었다. 3·1 대회 행사 이후 일어난 시위 도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에게 미군정 경찰들이 발포한다. 하지만 경찰은 발포자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은 없이 3.1절 집회 주도자와 시위자 검거에 나섰다. 이어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과 제주도 주민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면서 4·3이 일어났다. 당시 봉기는 전력 부족으로 게릴라 형식이었으며 경찰이나 군과 비교하면 계란에 바위치기 수준이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해안선 5km이상 지역은 적성지역으로 통칭됐고, 통행을 금지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됐다. 이듬해 봄까지 지속된 초토화 작전으로 희생자는 3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도 예비검속과 연좌제로 주민들은 탄압받았으며 1954년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4·3이 끝나게 된다. 최의종 기자 chldmlwhd731@konkuk.ac.kr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목+내용 댓글 닉네임 쓰기 Prev 1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68 Next / 68 GO / 68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