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120 추천 수 0 댓글 1

 

10736_12591_4634.jpg
전종현 예술디자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강사

 

나는 지금 ‘생각하기/이해하기’라는 1학년 수업을 진행 중이다. 올해 학사 커리큘럼이 개편되며 새로 생긴 과목인지라, 스타트를 끊는 입장에서 나름의 수업 목표를 설정해봤다. ‘디자인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인문 지식을 습득한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 필드에 실제 출현한 디자인 작업의 생애를 정리한다. 궁극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공포심을 해소한다.‘

말이야 쉽지! 조형 능력을 갈고닦기에도 시간이 늘 부족한 신입생이 잠시라도 언어로 사고하는 기회를 갖고, 글을 매개로 감각과 의견을 명징하게 전개하는 시도를 통해, 훗날 다양한 사람들과 원활히 소통하는 기반을 다질 수 있길 소박하게 소망 중이다.

얼마 전 디자인 다큐멘터리 3부작을 보여주고 감상문 세 편으로 중간고사를 대체했다. 오타나 비문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다큐멘터리 내용을 충실히 요약하고 자신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밝히라 종용하며 감상문을 받았다. 186편을 채점한 후 전체적인 결과를 분석해보니 흥미로운 흐름이 포착됐다. 경험이 많아 유리할 거라 생각했던 고학년보다 갓 들어온 신입생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이다.

원인은 바로 솔직함이었다. 1학년은 의식의 흐름을 적거나, 편지처럼 의견을 말하고,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는 등 형식은 중구난방이었지만 내용 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감정, 경험, 생각,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주 명확하고 정직하게 내뱉는 반응은 무척 신선했다. 정형화된 감상문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고학년은 형식 면에서 정갈하고 유려했지만 생기가 없는 글이 자주 보였다. 신입생과 1년 차이인 18학번에서도. 심지어 다큐멘터리 자막을 모아 기술적으로 재배열한 경우까지 있었다.

어쩌면 나는 한국 고등교육의 큰 비밀을 엿본 것일까.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들어와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동화되는 데 1년이면 차고 넘친다는 사실 말이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학점을 체크하며, 어느새 ‘눈치’와 ‘노하우’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개성 넘치는 주관과 목소리는 얼마나 쉽고 허무하게 사그라드는가. 자유롭기로 학교 대표 격인 디자인학과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면, 과연 다른 단과대학은 어느 상황일지 감히 생각하기도 두렵다.  

사람들은 요즘 대학생이 너무도 자유분방하다 흉보지만, 어쩌면 진실로 자유로운 순간은 입학 이후 단 몇 개월일지도 모른다. 솔직함이 샘솟는 곳에 미리 우물을 파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땅은 굳어 단단해지고 훗날 순수한 주관을 퍼올리기란 영영 힘들어진다. 지식과 지혜, 스킬과 노하우 모두 좋지만, 새내기에게 정말 필요한 건 거칠고 서툴지라도 비정형적 사고의 틀을 자유롭게 유지하는 것 아닐까.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유의 방’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구성원의 독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전종현 예술디자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강사  kk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커뮤니티
커뮤니티메뉴에 있는 게시판들의 모든 글이 자동으로 등록됩니다.
본 페이지에서는 글 작성이 불가능하니 개별 게시판에서 작성해 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게시판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306 청심대 일상 내아내와 결혼해 주세요 후기 [1] HAN 17.08.02 59
1305 청심대 일상 스파이더맨 홈커밍 리뷰 [7] HAN 17.08.02 60
1304 청심대 일상 [리뷰] 악의연대기 - 풀리지 않는 쇠사슬 궁시렁대쥐 17.08.01 85
1303 청심대 일상 리뷰] 쥬라기월드 - 다시 돌아온 그때의 영화 궁시렁대쥐 17.08.01 28
1302 청심대 일상 [리뷰] 디시에르토 - 살고싶다면 달려라 -★★★ 궁시렁대쥐 17.08.01 20
1301 청심대 일상 군함도 [7] 궁시렁대쥐 17.08.01 59
1300 청심대 일상 이태원 재즈바 부기우기 [3] jmyoo96 17.08.01 558
1299 청심대 일상 브로우카라 아리따움 황홀한 바다조름 17.08.01 166
1298 청심대 일상 주스킹 [3] 건국지식 17.08.01 84
1297 청심대 일상 랑콤 뗑 미라클 파운데이션 p01 [7] 만족한 멕시코파랑지빠귀 17.08.01 486
1296 청심대 일상 건대 골목에 골목 [6] 뚜니 17.08.01 318
1295 청심대 일상 후문 왕소구이 [1] 황홀한 바다조름 17.08.01 161
1294 청심대 일상 이니스프리 블루베리 약산성 클렌징폼 [4] 의연한 따개비 17.08.01 1336
1293 청심대 일상 서래갈매기 의연한 따개비 17.08.01 29
1292 청심대 일상 카페타우 [4] 의연한 따개비 17.08.01 78
1291 청심대 일상 투고샐러드 [10] 깔끔한 초원목고리뱀 17.08.01 377
1290 청심대 일상 골목에 골목 [2] 깔끔한 초원목고리뱀 17.08.01 57
1289 청심대 일상 페르시안 걸프 [6] 깔끔한 초원목고리뱀 17.08.01 75
1288 KLOSET : 패션매거진 <건국대학교 학생 모델 구인> [3] file KLOSET 17.07.31 38933
1287 청심대 일상 [돼나무숲 요정의 스무번째 리뷰] 가로수길 브루클린더버거조인트 [5] file 돼나무숲 17.07.31 336
목록
Board Pagination ‹ Prev 1 ...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 129 Next ›
/ 129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