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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은 글라스를 닦다 말고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담배 자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흐릿하게 퍼지는 담배 연기가 좋아 아직도 끊지 못했다. 여자가 뭔 담배냐는 핀잔도, 멘솔이 무슨 담배냐는 놀림도 영원은 굴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게 문을 닫아버릴까 생각하다가 바깥에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곱게 마음을 접었다.

애플 마티니 하나랑 아디오스 하나요.

밀려오는 주문에 잔을 내려놓고 셰이커를 집어 들었다. 더더욱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나갈 시간은 손톱 끝만큼도 없었다. 우현이 도와주고 있는 데도 바빴다. 정신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우현이 바에 주문서를 한 번 더 밀어 넣었다. 덩달아 영원의 손길이 빨라졌다. 흔들흔들. 셰이커가 흔들릴 때마다 영원의 시야도 흔들흔들 거렸다. 영원은 종종 이럴 때마다, 셰이커가 흔들릴 때 세상도 같이 흔들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많이 바쁘죠.

우현이 파란 칵테일이 찰랑이는 잔을 들고 얼굴을 들이 밀었다. 머리카락 끝은 살짝 젖어 있었다. 영원은 낯선 사람을 보는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노란 핀 조명 아래에서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이 아직도 생생했다. 건반 위에서 달려 나가던 긴 손가락이 아는 사람의 손이 맞나, 의문이 생겼다. 영원은 갑자기 눈이 쓰라렸다. 눈이 부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은 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핸드폰이 11시를 알리며 울었다. 아직도 바깥은 깜깜했고 사람은 북적였다. 마감은 세 시간이나 남았다. 영원은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셰이커를 내려놓았다. 탁, 하고 거품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연, 이름이 이우연이에요?

아르바이트생을 뽑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렇게 흐릿한 이력서를 가져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잉크가 부족했던 건지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고 사진은 얼굴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있었다. 본인이 직접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바로 버려버렸을 만큼 상태는 심각했다.

아뇨. 우현, 이 우현이요.

영원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우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으면 안 될 것을 물었나, 머쓱해하면서 눈으로 천천히 살펴봤다. 끝부분이 갈라져 노랗게 물든 밝은 갈색 머리카락부터 잔뜩 굳어있는 손끝까지. 하얗게 튼 손끝이 영원의 눈에 들어왔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가락에서 문득 유화 물감 냄새가 났다.

혹시 그림 좋아해요?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면접에서 나올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상대방이 경영학과이면 더욱이나. 꼭 작업 거는 것도 아니고. 영원은 순간 창피해졌지만 조금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다잡았다.

아뇨?

생뚱맞은 질문에 우현도 당황했는지, 말끝이 조금 올라가 의문형이 되어버렸다. 그런 건 왜 묻나요, 하는 순수한 20대의 얼굴을 보면서 영원은 이상하게 안도했다. 이력서를 반으로 접어 파일 안에 곱게 끼워 넣었다. 무언가를 더 묻거나 설명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출근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영원은 우현이 마음에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이 오지 않을 거라는 되지도 않는 확신으로 자신을 설득하면서까지 영원은 우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끝만 노란 갈색 머리도, 하얀 손끝을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손동작도, 어색한 20대의 눈빛도. Stay there, soft and blue. 전체 반복을 눌러 놓은 팝송 100선 중 한 곡이 익숙하게 귀를 스쳤다.

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계산대에 서 있는 우현은 영원의 생각대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메뉴 이름을 외우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평일 내내 나오는 것치곤 오래 걸리는 거지. 영원의 놀림에 우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며 죄송해요, 하고 웃었다. 노란 머리는 점점 갈색 머리끝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커피 좋아해?

아, 네.

우현이 차가운 라테를 홀짝였다. 일회용 잔 겉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우현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한 모금 더 마셨다. 슬그머니 가까워지는 눈썹 사이가 우현의 말이 귀여운 거짓말임을 보여줬지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카페 모카와 카페 라테를 구분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이미 우현이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영원은 그래도 그 점 또한, 우현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어색하지만 노력하는 밝은 아르바이트생. 펍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카페에는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카페가 특이하네요.

영원이 가게 문을 열고 가장 많이들은 말 중 하나였다. 영원의 가게는 누군가에게는 카페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펍이었다. 낡은 흑백사진들이 벽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었고, 구석에는 불이 꺼진 네온 장식도 있었다. 낮에는 나뭇잎과 꽃잎에 가려지다가도 밤이 되면 조명과 낡은 사진들은 어둠속에서 반짝였다. 노래는 보통 80년대부터 00년대까지의 팝송들이 대다수였는데, 그게 묘한 매력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곳에 있으면 꼭, 옛날 속에 있는 것 같아요. 그 영화 아나요? 미드나잇 인 파리. 그 영화 진짜 재밌는데. 영원은 그 말을 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도저히 기억할 수 없었다. 그냥 누군가 그런 말을 했고, 가끔 손님들이 카페, 혹은 펍이 특이하네요, 하고 말을 걸어올 때 그 말을 그대로 들려주곤 했다.

특이하다고 어딘가에 소문이라도 난 건지 종종 커다란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들이 다녀가곤 했다. 카메라는 흐르는 음악과 커피 향을 뚫고 철커덩, 묵직한 소리를 바닥에 내뱉었다. 영원은 그 때만큼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편안하던 카페도 순식간에 불편해졌다. 바닥의 나무 무늬가 영원의 눈앞에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바닥만큼은 대리석으로 할 걸 그랬어. 종종 조용히 중얼거렸다.

처음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카페를 생각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흔하게 있는 두어 개의 카페처럼 무난한 나무문을 걸고 나무 탁자를 들여놓고 푹신한 소파와 각진 의자 몇 개를 늘여놓고. 그 계획이 바뀐 건 순전히 사월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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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차릴 거야.

통장 정리를 하던 영원이 펜을 내려놓고 오늘 날씨 참 좋지, 하는 말투로 흘리듯 이야기를 꺼냈다. 햇빛에 사월의 긴 머리가 반짝이고 있을 때였다. 흐르듯 바닥을 향하는 머리카락은 종종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흩날리기도 했다. 사월은 신경도 쓰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당근을 썰고 있었다. 통통통. 경쾌한 소리에 사월의 노래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요리하는 사월의 손끝은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영원은 머릿속에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숫자들을 끌어안고 하얀 종이에 옮겨 담았다. 따뜻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사월이 웃으며 말했다. 다 썰어진 당근은 프라이팬 위에서 밥과 함께 볶아졌다. 잘게 부딪히는 빗소리가 났다. 순간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질녘도 되지 않은 낮이었다. 영원은 한가한 시간을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I don't know who you are, Henry……. But I dream about you almost every night.

사월과 영원의 사이로 여자주인공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빗소리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사월은 분홍빛의 꽃이 그려진 그릇 위에 예쁘게 볶음밥을 담고 있었다.

그냥 대충 먹지. 예쁜 밥이 더 먹기도 좋은 법이야. 빨리 이리 와. 밥 먹자. 영원은 통장과 노트를 덮고 사월에게 다가갔다. 연한 물감 향기가 났다. 그리고 영원은 바로 다음날 부동산을 알아보았고, 또 그 다음 날 인테리어 업자를 찾아갔다.

따뜻한 색이었으면 좋겠어요.

뜬구름 잡는 영원의 말에 업자의 얼굴이 난감하게 웃었다. 아, 예쁘면 더 좋고요. 덧붙인 영원의 말에 웃음은 더 짙어졌다. 무슨 색이라고요? 따듯하고 편안한 색이요. 업자는 따뜻하고, 에 힘을 주는 영원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곤 ‘따듯’에 동그라미까지 쳤다. 톡톡 책상을 연필로 두드리는 모습이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가 톡, 톡, 톡, 으로 다시 느려지고 있었다. 끝내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반대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툭, 툭. 아까보다 더 무거운 소리였다. 영원은 굵은 손가락 끝을 바라보다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따듯한 색이면 아무거나 괜찮아요. 따듯하고 편안한 공간.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공간. 영원은 뭉개진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업자는 머리를 몇 번 긁더니 커다란 책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안에는 다양한 가게들의 사진이 늘어져 있었다. 모델 하우스 같이 예쁘게 찍힌 사진들은 온기는 한 점도 없었다. 영원은 엇비슷한 공간에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다양한 이름들을 눈으로 훑기만 했다. 모던, 심플, 블랙 앤 화이트. 주르륵 다음 장으로, 다음 장으로 향하던 영원의 눈에 나무가 잔뜩 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커다란 나무 사이에서 잠자듯 놓여있던 피아노 사진이 떠올랐다. 사월이 보던 만화의 한 장면이었다. 자신을 연주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낡고 검은 피아노. 젖은 소리로 울던 피아노, 소리가 난다고 소리치던 더벅머리의 아이. 그 장면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걸로 할게요.

이걸로요?

업자는 갑자기 마음을 정한 영원이 의외라는 듯 손끝을 바라보았다. 관리하기 힘드실 텐데요. 상관없어요. 업자는 조심스레 사진을 꺼내 영원에게 내밀었다. 영원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사월에게 사진을 전송하곤 다시 사진을 업자의 손에 돌려보냈다.

매장 이름은 생각해 보셨어요?

아니요.

영원은 아차,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업자는 한숨을 내쉬며 영원을 돌려보냈다. 아니, 이름도 생각 안 해보셨어요? 마지막에는 난감한 얼굴을 넘어서 한숨까지 내쉬었다. 다음번에 오실 때에는 좀 더 생각해 보시고 오세요. 그대로 쫓겨난 영원의 핸드폰엔 사월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예쁘네! 영원은 그치, 딱 이 정도가 좋아, 하고 사월에게 웃는 이모티콘을 한 아름 보냈다.

 

그래서, 어떤 메뉴가 제일 맛있어요?

우현이 불쑥 영원에게 물었다. 영원은 조심스레 케첩을 짜다말고 메뉴판을 들었다. 영어와 한글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메뉴판에는 그림 하나 없었다. 사실 카페 겸 펍이라고 해도 메뉴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주방 직원이라곤 한 명 밖에 없었고, 주방장이자 그냥 직원인 그 사람이 쉬는 날에는 영원이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영원은 썩 좋은 요리사는 아니었다.

제일 많이 나가는 건 나초에 치즈. 아니면 칠리소스. 혹은 감자튀김. 감자튀김을 만들 때면 영원은 그 옆에 최대한 작게, 많은 양의 케첩을 짜냈다. 뾰족한 세모 모양으로 케첩을 쌓다보면 가끔 주르륵 옆으로 흐를 때도 있었다. 제일 덜 나가는 메뉴는 동그란 닭튀김이었다. 아예 안 나가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메뉴에 비하면 열 번 중 한 번에 불과했다.

감자를 튀기건 고기를 튀기건, 전부 똑같은 사람의 손에서 똑같은 기름을 써서 똑같이 만든 음식이라 다를 건 하나도 없었다. 차이점이라곤 감자와 고기라는 점뿐이었다. 뭐가 더 맛있는지는 주인인 영원도 몰랐다.

샐러드가 제일 맛있을 것 같아요. 치킨 샐러드.

애매한 메뉴였다. 가장 중간쯤의 가격에 가장 중간쯤의 판매량. 영원은 딱 그만큼 애매하게 웃었다. 반면 우현의 입 꼬리는 저 위로 올라갔다. 올라갔을 것이다. 목소리가 그랬다. 주방의 환한 불빛에 바 건너편의 우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점차 길어지고 있는 해는 건너편 빌딩 너머에서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내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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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연 팀은 언제 온대요?

글쎄. 그건 가누가 알 텐데.

영원의 펍에서는 한 달에 단 한 번 무료로 라이브 공연을 열었다. 호스트는 영원이었지만 실질적인 호스트는 하우스 밴드 멤버인 가누였다. 능력 좋게도 가누는 매번 다른 가수들을 섭외해왔다. 사진을 찍는 카메라도, 소리를 담을 녹음기도 없는 공간에서 공연을 한 가수들이 벌써 열 손가락을 두 번 접었다 펴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낡은 흑백 포스터와 사진 사이에서 그들은 오래된 노래를 불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시 반이었다. 여덟시가 공연 시작이었는데 아직도 가누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너는 오늘도 공연 보고 가려고?

공연이 있는 날, 우현은 그 날들만큼은 일이 끝나도 가지 않고 공연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영원은 칵테일을 하나씩 가져다주었다. 종류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그래도 최대한 겹치지 않게 영원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기도 했다. 다만 한 달에 한 번 뿐이기에 저번 달에 뭘 만들어 줬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영원은 오늘도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데킬라에 럼, 진, 보드카까지 조금씩 섞은 후 이것저것 집어넣고 대충 저어서 우현에게 내밀었다. 블루 큐라소가 들어가서 그런지 새파랬다. 우현은 우와, 한 마디만 하고 잔을 받아들었다.

너무 파래서 눈이 시린 칵테일을 받아들고 우현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감성적이긴.

영원이 가볍게 놀리자 얼굴을 붉혔다. 순진한 반응에 영원은 우현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왜, 호수라는 생각은 안 드니?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네요.

그래도 이제 제법 맞받아치기도 했다. 발간 얼굴을 숨기려 움츠러들던 목도 옛날 얘기였다. 적어도 움츠러들진 않았다. 거북이가 진화했다며 또 놀림 받을 거리가 늘어났긴 했지만.

이름이 뭐에요?

우현이 잔을 들어 빛을 비춰보며 영원에게 물었다.

아디오스.

아디오스요?

응. AMF라고도 하고.

뭐야, 빨리 가라고 주는 거 아니죠?

살짝 붉은 기가 떠있는 얼굴이 말갛게 웃었다. 부끄러움은 조금 덜 타게 된 우현이지만 저 말간 웃음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영원은 저 얼굴을 볼 때마다 뽑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는 표정만큼은 펍에도 잘 어울렸다. 서로 다른 낮과 밤의 가게에 모두 어울리는 것은 우현뿐일 거라고, 종종 그렇게 느끼기도 했다.

아, 맛있다.

우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원은 그때 처음 알았다. 눈동자는 진한 고동색이었구나. 평소보다 조금 더 즐거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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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고 싶어.

이젤을 세워놓고 앉아있던 사월이 말했다. 영원은 세필 붓으로 먼지를 털어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바다? 동해 바다가 보고 싶어. 사월이 물감을 주욱 짜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란 색이었다. 동해? 응. 서해 말고? 응, 동해가 보고 싶어. 동해는 너무 멀어. 그리고 더 파랗지. 더 깨끗하고. 더 맑아. 해도 더 빨리 뜨잖아.

사월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허밍은 이리저리 마음대로 음을 바꿨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다가도, 전혀 알 수 없는 노래로 바뀌기도 했다. 영원은 순간 사진을 찍고 싶어 묵직한 카메라를 집어 들었지만 필름이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대로 보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되지 않는 이유를 들먹이면서 사월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담았다. 붉은 노을에 갈색 머리가 빨갛게 보였다. 창밖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 바다 놀러갈까.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불가능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입 밖으로나마 꺼내보고 싶었다. 동해 바다에 가서 회도 잔뜩 먹고 바닷가 공연도 보고. 끝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언제?

아마도 우리 둘이, 같이 쉬는 날에.

나는 언제나 휴일인걸.

사월은 손을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바다 냄새가 손끝에서 물씬 풍겼다.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냄새가 났다. 영원은 눈을 감았다 떴다. 쉬는 날에 바다로 가자.

그렇지만 넌 바쁘잖아. 생각해봐. 바로 내일도 스케줄 있지 않아?

음, 그렇긴 하지.

봐봐.

사월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손놀림을 좀 더 바삐 하는 모습이 딱 토라졌을 때였다. 벽 한 쪽에 걸려있는 달력에는 동그라미 쳐지지 않은 날을 세는 것이 쳐진 날을 세는 것보다 빨랐다. 영원은 카메라를 매만졌다. 조금쯤 미안해졌다. 괜한 바람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대신 이번엔 꽃 보러 가자. 벚꽃을 보러 가는 거야. 나는 거기서 사진을 찍고, 너는 그림을 그리고. 사람이 많을 텐데? 사월은 다른 물감을 꺼내 다시 한 번 죽, 짜냈다. 그래도 상관없어. 어쨌든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손끝에서 천천히 구름이 솟아났다. 꼭 동해 같네. 영원의 말에 사월이 그래? 하고 웃었다. 아니야? 글쎄. 사월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흐릿한 바닷가에 두 사람이 있었다. 손을 잡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는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동해인지, 서해인지, 아니면 호수인지, 그것도 아니면 하늘인지 모를 파란 색의 틈으로 희뿌옇게 구름이 피어났다.

그냥, 바다도 가고, 벚꽃도 보러가자. 그 다음엔 장미를 보러가고, 그 다음엔 낙엽을 보러가는 거야. 그리고 다시 바다를 가자.

영원은 꿈꾸듯 중얼거렸다. 바다가 금방이라도 바로 앞에서 파도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원은 지금도 꿈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피아노 세션이 잠수래요.

가누의 말에 영원은 오늘 공연을 취소할까 고민했다. 어차피 사정에 따라서 공연 시간도 마음대로 바꾸고, 출연 가수도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많았다. 공연이 없다면 손님들이 조금 실망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피아노가 빠지면 어쩌지. 영원은 그냥 이대로 해, 라고 하려다 가누가 무슨 말이라도 더 해 주길 기다렸다.

사장님.

갑자기 우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높다란 머리 위로 손이 불쑥 솟았다. 꼭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표시간에 맨 앞에 앉은 꼬맹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영원은 손끝을 보다가 왜, 하고 답했다.

오늘 공연 곡, 봄노래라고 들었어요. 맞나요?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우현의 말에 영원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공연 내용은 영원의 구역이 아니었다. 영원이 하는 일은 가게의 구석을 조심스레 내어주는 게 전부였다. 영원의 시선 끝에서 가누가 그렇긴 한데, 하고 긍정했다.

그럼 제가 할 게요. 저 진짜 잘 할 자신 있어요. 공연 안 망치게 잘 할게요.

반쯤은 주눅 들고 반쯤은 흥분해서 빠르게 내뱉는 우현의 말에 영원이 손을 살짝 들었다. 영원이 아는 한, 우현은 경영학과였다. 피아노와는 거리가 먼. 우현은 숫자와 그래프로 가득한 세상에 있는 사람이었다.

너 전공이 음악이었나?

아뇨. 그건 아닌 데요…….

영원은 우현의 하얀 손끝을 떠올렸다. 단단하게 굳은 손끝. 네모난 손끝. 영원은 그 동안 그걸 몰랐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현이 처음 왔던 게 지난여름의 입구였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봄이 짧다는 걸 감안하면 벌써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간 셈이었다.

밴드랑 얘기 한 번 해봐. 여기 가누도 있겠다. 좋네.

어차피 정해진 공연이고 밴드 멤버는 가누를 필두로 어쩌다 모인 사람들이었다.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공연까지 한 시간 남았으니까, 적당히 맞춰보자.

가누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우현을 끌고 가게 구석으로 갔다. 어느새 전자 피아노가 자리를 펴고 서 있었다. 옹기종기 모인 하우스 밴드 멤버들 틈바구니에서 우현이 어색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덟 시까지는 금방이었다. 펍이 가득 차는 것도 그만큼 순식간이었다. 나름 이름 있는 여가수는 안녕하세요, 오늘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평범한 인사 한 마디를 끝으로 내리 노래를 불렀다. 힘들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영원은 스테이지 조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명을 꺼버렸다. 사람들은 불이 꺼지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공연 내내 영원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조명이 너무 밝았기 때문이라고, 영원은 가까스로 변명했다. 스테이지 바로 옆의 네온 조명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Don't Break the Spell of a Life Spent Trying to Do Well. 푸르게 빛나던 글자가 나긋한 여가수의 허밍과 뒤섞였다. 어지러웠다.

밤 11시가 되자 펍은 더더욱 달궈졌다. 공연이 끝난 밴드 멤버들과 가수는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영원은 뒤돌아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다행히 주문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한낮의 커피 향이 묻어있던 손에 알코올이 옮겨 붙었다. 엉킨 냄새는 개수대에 흘려보내도 사라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저 어땠어요?

칭찬을 바라는 아이의 얼굴을 들이민 우현을 보다가, 손을 내밀어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주었다. 영원 나름대로의 칭찬이었다. 우현은 그 와중에 영원의 젖은 손 덕분에 망가진 머리를 다시 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현의 머리카락을 따라 흐르던 물방울 몇 개가 바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영원은 젖은 우현의 머리카락도, 방울방울 무늬가 생긴 나무 표면도, 문득 낯설게만 느껴졌다.

피아노, 배운거야?

네.

난 몰랐는데.

아무도 몰랐을 걸요.

어차피 다들 관심도 없었고 말이에요. 우현은 다듬던 머리를 결국 포기하고 시원하게 뒤로 넘겼다. 앞머리로 덮여있던 이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영원은 얼룩하나 없이 깨끗한 우현의 이마를 보다가 탁, 하고 내려쳤다. 아프다며 끙끙대는 우현을 무시하고 영원은 물 묻은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흘긋 남은 잔의 개수를 세어보니, 마감까지 잔이 모자를 것 같았다. 하얀 린넨 천을 탁탁 털고 물 자국을 닦아냈다. 뽀드득, 뽀드득, 시끄러운 펍 안에서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렸다.

저 피아노 좋아해요. 노래도 좋아하고요, 사실 기타도 배우고 싶어요.

그랬구나.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아하는 게 좋은 거지. 나도 그랬고 말이야. 용기 가득한 아이 같던 우현은 그래서 말인데요, 하고 다시 소심한 청년으로 돌아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하얀 손끝은 아직도 영원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음, 저기, 사장님.

왜?

다시 셰이커를 집어 들었다. 열심히 흔들어야만 했다. 칵테일 만드는 사람이 하나뿐이라 쉴 수가 없었다. 영원은 적당히 흔들었다고 생각 될 때 쯤 잔에 옮겨 담았다. 파란색 칵테일이 잔 표면에서 넘실거렸다. 조금 양이 많았다.

걔도 아디오스에요?

아니. 블루 하와이. 흔하지. 만들어 줄까?

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쳐 묶이지 못한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영원은 칵테일을 다른 잔에 조심스레 덜어냈다. 컵 표면을 타고 파란 칵테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영원은 천으로 잔을 닦은 후 레몬 조각을 조심스레 꽂았다. 둥글둥글하게 말린 빨대만 꽂으면 끝이었다. 대충 흘린 칵테일을 닦아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는지, 나무 표면은 이제 고동색으로 변해있었다.

그거 제가 나갈 게요. 몇 번 테이블이에요?

7번. 갈 수 있겠어?

당연하죠. 저 이래보여도 일 년 전에는 서빙 했어요.

당당한 사람치고는 손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영원은 그래, 다녀와, 하고 개수대의 물을 틀었다. 쏴아아. 셰이커 안에 있던 파란 칵테일은 빠르게 씻겨 나갔다.

 

사월은 어느 날 집을 나갔다. 나갔다, 라고 하기에는 그냥, 어느 순간 오지 않았다, 가 적당했다. 어차피 영원의 집에 사월이 놀러오는 것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한 낮의 카페였다. 영원은 다이어리에 새로운 촬영 스케줄을 적고 있었고 사월은 그런 영원의 손을 그리고 있었다. 햇살은 아직도 따스했다. 가을의 햇살은 여름과는 달리 매끄러웠다. 영원은 햇빛을 찾아 사월을 끌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왜?

그냥.

시끄러운 카페 안에 있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착각이 들었다. 사월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맑은 얼굴은 햇빛 때문에 노랗게 빛났다.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맑은 손끝에는 알록달록, 단풍이 물들어있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

한숨처럼 나온 말이었다. 다이어리를 덮고 손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림을 그리던 사월의 손이 멈추었다. 꼭 네 이름 같은 말이네. 사월이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그래도 영원아, 곧 해는 지는 걸.

응?

해가 진다고. 지금은 저녁 시간이잖아.

여름인데 더 오래 있지 않을까?

글쎄.

시답잖은 얘기는 금방 끊겼다. 영원은 너무 바빴고, 사월은 그림에 빠져있었다. 중간 중간 저녁은 뭐 먹을까, 글쎄, 하는 너무 사소한 얘기가 몇 번 더 오갔다. 종종 이 때를 생각하면 영원은, 조금만 더 얼굴을 마주할 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영원이 사월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마침내 결론내린 것은, 어느 날 벽에 홀로 서있는 이젤을 마주했을 때였다. 이젤 위에는 얇게 먼지가 앉아있었다. 그날 저녁 영원은 남은 짐을 한데 모아 장롱 안에 한 가득 쑤셔 넣었다. 커다란 이젤은 끝끝내 넣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동안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영원은 인테리어 회사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카페 이름, 생각 해 봤는데요.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큼큼, 하고 몇 번 목소리를 다듬고 조심스레 꺼냈다. 영원은 카페의 간판을 올리던 날 사월을 떠올렸다. 피아노의 숲. 피아노의 숲 안에 영원은 사월의 그림 옆에 낡은 사진들을 걸어 널었다. 흑백 필름에 푹 빠져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셔터만 누를 때의 사진들이었다. 사람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낡은 차와 오래된 거리만 등장했다. 스튜디오 사진만 찍던 영원의 마지막 풍경 사진이었다. 엉망진창이라고만 생각했던 흑백사진은 카페와 펍 양쪽에 퍽이나 어울렸다.

 

우현은 비틀비틀하면서도 무사히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첫 공연이었던 주제에 손님들이랑 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잔뜩 취한 공연 팀이 우현인지 우연인지 모를 이름을 연신 외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새로운 주문보다 원래 있던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일 시간이었다. 영원은 담배를 쥐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전부 져버린 벚꽃 나무 옆에 한참을 서 있다가 불을 붙였다. 노란 가로등 밑에서 나뭇잎이 반질반질 빛났다. 후, 숨을 뱉으니 몽글몽글 연기가 올라왔다. 연기는 뭉치기도 전에 허공에 흩어졌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때도, 지금도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이미 오늘의 해는 졌고,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앞으로 분홍색 꽃잎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발가락을 간질거릴 수 있을 만 한 거리에서 꽃잎은 움직이지 않았다. 영원은 손끝으로 조심스레 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만 봤다. 바람이 불었다. 어디선가 햇빛의 냄새가 났다.

 

 

이윤경 (문과대·국문3)  kk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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